[576] 12. 학급자치회의 울타리 두르기
올해도 학급자치회의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중 총 9시간(1학기 5시간, 2학기 4시간)을 배정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꼴인 학급자치회의. 저는 이에 대해 좋은 추억 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 1때 담임 선생님은 정치경제 교과를 가르치는 분이셨습니다. 연배가 있으셨음에도 - 나중에 알았지만,저보다 네 살 어린 외동 아들이 있었습니다. 연배는 저희 아버지보다 많으셨는데... 그 아들을 제가 2년 넘게 과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정치경제 교사답게(!) 학급회의 때는 항상 교실 바깥에 계셨습니다. 그 때는, 고등학생은 대입을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학급의 여러 일 따위는 없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반장선거 같은 것도 없었고, 담임 교사가 반장감(!)인 친구를 뽑아 그냥 반장을 시키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제게 반장을 하라고 시키셨던 그 담임 선생님께서, 학급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지키시면서 항상 그 시간이면 자리를 비켜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도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민주적(!)일 수 있는가... 물론 학급회의는 거의 난장판이었습니다. 그저 담임 선생님 없는 시간에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의견이랍시고 안건에 붙여달라고 떼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민주적 의사소통에 대해서 항상 잘은 모르지만 나름대로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그 때문에 사단(!)을 겪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고 1때는 담임 선생님이 시킨 반장이었지만, 고 2 때는 담임이 시킨 학급 회장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반장이 학급의 전반적인 일을 돌아보았고, 회장은 학급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장이 행정부라면, 회장은 입법부쯤 되겠네요. 어쨌든, 첫 학급회의를 하는데, 담임은 뒤에 서서 저희 회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주의 주제에 대해 실천사항을 정한 후, 건의사항을 받는데 한 친구가 손을 번쩍 들면서 이렇게 건의하였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학급 규칙으로 7시까지 등교하도록 정하셨는데 너무 이른 시간 나오면 수업 능률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0교시가 7시 30분에 시작하는데 7시 20분까지만 등교해도 충분히 수업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등교 시간을 7시에서 7시 20분으로 바꿀 것을 건의합니다.’ 저는 담임이 뒤에 있었음에도 의젓하게, ‘건의 감사드립니다. 담임 선생님께 의원님의 건의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흐른 후, 담임의 한 마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담임은 교단에 올라가서 일갈하였습니다. ‘건방지게 담임이 결정한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놈들은 뭐냐! 회장은 회의를 그 딴 식으로 밖에 진행하지 못하는거야? 내일부터 7시가 아니라 6시 반까지 등교해!’ 뭐, 그 다음 이야기는 뻔한 전개입니다. 방과 후에 반장과 저는 체육실로 가서 담임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원래대로 7시에 철저하게 나오도록 할테니 한 번만 생각을 철회해달라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 이를데 없는 일입니다.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공간이며, 우리는 좋은 대학을 위한 어른들의 계획에 토 달지 않고 따라야 하는 존재들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뭐, 그런다고 달라질게 뭐 있습니까. 그저 담임에 대한 존경심은 없이 반감만 컸을 뿐이죠.
발령이 난 후, 저는 학급(자치)회의 때 어린이들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것을 항상 누누이 말하곤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의 안전과 발달을 고려하여 가급적이면 선생님의 뜻을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해 둔 몇 가지 - 짝은 무조건 남녀로 모두가 고루고루 앉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급식은 무조건 번호 순으로 차례대로 순서를 돌아가는 것 - 만 빼고는, 모든 것을 어린이들에게 맡기겠다는 의견을 항상 전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전까지, 여덟 번의 6학년 담임 교사를 담당하며 지켜봐 온 학급자치회의의 단상은 아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어린이들은 규칙 정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참 묘합니다. 학년 초 규칙 세우기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 욕하지 마라, 실내에서 뛰지 마라, 싸우지 마라 정도의 기본적인 규칙만 안내할 뿐인데, 학급자치회의를 하는 순간 어린이들은 이런저런 규칙을 내어놓기 바쁩니다.
과제를 제때 내지 않는 어린이는 남아서 과제를 하고 가는 규칙을 세우자고 하는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아서 과제를 하고 가면, 그건 누가 지켜 보는 건데? 선생님이요~ 그럼, 나한테 먼저 동의를 구해야 하는거 아냐?
수업 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어린이는 청소를 시키자는 규칙 앞에서는, 선생님이 벌하는 규칙을 세우지 않겠다고 새학년 첫 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너희가 너희 친구를 벌하자는 규칙을 세우는거니? 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 해 이런 일이 반복되고 나니, 왜 이럴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뜻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 지내오며 규칙을 정한 후 상벌을 적용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 진 것이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규칙을 정해야 할까. 그 규칙은 과연 교실살이에 필요한 것이라고 충분히 확인한 후에 수립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올해의 어린이들은 예년의 어린이들과 다를 수도 있는데 정하는 규칙은 예전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어린이들을 그 안에 짜맞추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제가 6학년 담임 경험 밖에 없기 때문에, 저학년의 처지를 잘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당위의 규칙은 있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상과 벌을 목적하는 규칙은 과연 의미있을까에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는 점입니다.
2. 어린이들은 건의하기에 여념 없으며, 이를 다수결에 붙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학급자치회의가 어느 순간 부터인가 소원수리의 장으로 바뀌곤 합니다. 해 달라는 것 이외의 의견들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너도나도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데 혈안이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다가 열 몇 개 쯤 받고 나서, 이제 다수결로 결정하겠습니다, 라고 의장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씩 건의사항을 읽고, 손을 들고, 그걸 헤아린 후,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두어개쯤 남기고는 다 지웁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저는 어린이들에게 다수결을 가르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수결은 민주적 의사결정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과용 도서에서는, 다수결 이전에 민주적 의사결정의 태도로 ‘관용’, ‘비판적 태도’, ‘양보와 타협’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저는 여기까지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어떤 한 어린이의 의견에 대해, 우선 열린 마음으로 어린이의 의견을 경청하여 받아들이되, 의견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과 문제점을 꼼꼼하게 고려해 보며, 이를 토대로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문제점은 개선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면 됩니다. 담임 교사가 있는데, 합의를 중재할 수 있는 이가 교실에 상주하고 있는데, 다수결이 웬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에게,
- 비판적 태도는 의견의 문제점을 숙고하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점도 충분히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 다수결은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최후에 사용하는 방법이 되어야, 소수 의견을 가진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수의 결정에 따를 수 있다
고 안내하곤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올해 어린이들의 학급자치회의 첫 시간에는 울타리를 둘러 주었습니다.
우리 학급자치회의에서 다룰 큰 방향은,
1. 담임 교사나 학교에 건의할 사항
2. 우리 학급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상황
3. 우리 학급에서 함께 해 나가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안내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2015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이런 문제의식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저 학급자치회의는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생각 정도에만 머물고 있던 시기입니다. 어린이들이 거지 같은 담임 교사의 말을 잘 이해하였는지, 어느 날의 학급자치회의 때, 학급 음악회 계획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누군가가 의견을 내었고, 자치회 의장의 진행으로 어린이들은 일사천리로 학급 음악회의 계획을 완성하여 갔습니다. 전반적인 진행, 음악회의 사회자, 음악회 프로그램의 선정, 참여자 - 이는 모든 어린이들 - 등등등, 어린이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여 갔습니다.
저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창의적 체험활동 자율활동 중 세 시간을 빼내어 어린이들에게 쓰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빨리 끝났지만, 모두가 스스로 준비하고 참여하는 학급 음악회가 되었습니다.
학급자치회의에서는 그런 일을 해 나갔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첫 학급자치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시작하면서, 담임 교사는,
- 발언권을 자치회의 의장에게 얻은 후 발언하기
- (자치회의에 대한 경의를 드러내기 위해) 일어나서 발언하기
정도의 안내만 하고는 그냥 두었습니다.
어린이들의 건의사항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 쉬는 시간을 늘려달라
- 급식비를 증액하라
가 있습니다. 쉬는 시간 문제는 학교 차원에서도 많은 고민이 있을 듯 합니다. 어린이들이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쉬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급식비 증액 문제에 대해서는, 자치회의를 마무리하면서 말을 조금 보탰습니다. 우리 학교만 늘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모든 학교들이 늘려야 하는 문제인지라 복잡한 절차와 어마어마한 비용이 수반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 대하여는, 식물 기르기를 함께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논의가 지지부진하여 끝맺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학급자치회의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은, 어린이들에게 시간을 주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만들어가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학급자치회의를 개최해보니 그게 어린이들의 피로감을 늘리는 듯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울타리를 조금 더 둘러보고자 합니다.
- 처음 10분은 의견 청취
- 이후 20분은 의견 토의·토론
- 마지막 10분은 의견의 인용·기각 또는 이월 결정
을 어린이들에게 제안해 볼 생각입니다. 뭐, 어린이들이 받아들여줄 듯 싶지만 말이죠.
이후 학급자치회의의 진행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두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