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문교육, 논문 서칭?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초등교사, 초등수학을 말하다
11. 전문교육, 논문 서칭?
교대 진학을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던 순간부터, 만약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면 꼭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과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학 학습 부진아를 위하여 수학 내용을 계열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예컨대 6학년 1학기 소수의 나눗셈을 어려워하는 학생에게, 소수의 나눗셈을 배우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후 - 가령, 5학년 1학기 무슨무슨 단원을 풀어야한다, 같은 방식이 아닌, 소수의 나눗셈의 오류 유형 모두를 분석한 후 이것의 계열을 밝힌 후 - 이를 바탕으로 학생의 부진 요소를 파악하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자료 묶음을 만들어 내는 것을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발령 후, 담임하던 학생들의 오류 유형을 모두 스크랩해 두었고, 아직도 제 사진 앨범에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어쨌든, 2015학년도를 마치면서,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대학원 석사 과정에 원서를 넣었고, 면접 과정에서 이에 대한 제 생각을 면접관들께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합격했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학기 때가 기억납니다. 두 과목의 강좌를 수강하였는데, 둘 다 강사 선생님의 강의였고, 그 중 하나는 대학원생들이 논문을 다양하게 서칭해보고 그 중 특별히 주목하여 본 한국 논문 하나와 외국 논문 하나를 다른 대학원생들에게 소개하는 강의였습니다.
그 때 이런저런 논문을 서칭하면서, 저도 ‘구체와 추상’에 대한 논문 하나를 인상깊게 보았고 이에 대해 발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구체’와 ‘추상’을 피아제의 이론과 연결하여 연구하면 시사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다른 대학원생들의 발표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 있다면, 명상이 수학 학습의 정의적 영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입니다. 왜 기억에 남냐하면, 수학의 정의적 영역에의 영향을 위하여 명상에까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입니다. 그리고는 뭐...
교대 다닐 때도 그런 발표 수업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많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발표 수업은 발표자와 교수(또는 강사, 교사) 간의 문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방관자가 되고, 배움은 작습니다.
발표자와 나머지 수업 참여자가 발표 주제와 내용을 놓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논의를 키워나가는 수업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점은, 1) 발표의 주제와 내용이 모두에게 익숙하면서도 논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고 - 비고츠키의 ZPD? - 2) 발표자(혹은 교수, 강사, 교사)가 논쟁적인 발제를 하여야 하며 3) 이 과정에서 발표의 주제와 내용의 기반이 되는 이론과 개념이 내용과 사례를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실 수업도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주제와 내용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하되 논의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주제와 내용이어야 하고, 발표자 혹은 교사가 논쟁적인 발제를 제시해야 하며, 이를 통해 주제와 내용에 살이 붙을 수 있도록 발표 수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주목하여 본 논문에 대해 발표하는 것은, 만약 여러 저널을 통해 다양한 문제의식을 이미 가지고 있는 학생에게는 무의미하며, 아직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학생이라면 논문의 내용이 귀에 들어올리 없습니다. 게다가, 발표자 자신마저도 그 내용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발표하는 것이라면...?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발표 수업을 보면서 많이 느끼지 않습니까? 학생 주도적인 배움을 위해서 발표할 수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한데, 발표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의 배움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든다면, 더 큰 고민이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원에서 수강한 강좌가 총 10 강좌였는데, 이 중 세 번 쯤의 강좌가 다른 논문에 대한 발표 수업이었습니다. 마지막 학기 강좌도 기억에 남습니다. 마지막 학기이다보니 거의 완성된 자신의 논문에 대해 발표하는 강좌였는데, 이 강좌 또한 거의 강사 선생님과 대학원생 간의 일대일 수업에 가까왔습니다. 논문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과 탐구 과정 및 내용에 대해 계속 의문이 들었지만, 질문하기가 쉽잖았습니다. 그러한 의문은,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지, 이미 심사를 앞두고 있는 논문에 대해서 그런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차례가 되었을 때 현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조금 더 강력하게 내는 것으로 갈음할 뿐.
좋았던 강좌는, 지도교수님의 수학적 모델링 강좌와 같은 강사 선생님의 1학기, 4학기 강좌였습니다. 수학적 모델링은 학교 수학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고민에 좋은 영향을 준 이론이 되어 주었으며, 강사 선생님의 강좌는, 앞서 언급한대로, 모두에게 익숙한 주제와 내용의 발표가 수강생 간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수학 교육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주었던 것을 그 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가장 의미없었던 강좌는,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을 담고 있는 영어 교재를 각기 페이지를 나누어 번역한 후 소개하는 강좌였습니다. 대학원생에게 할당된 페이지는 챕터 단위가 아니어서 챕터의 중간부터 번역하여 챕터의 중간까지 번역하여 발표하였고, 그렇다보니 대부분 대학원생의 발표는 그 맥락이 분절된 채로 발표되기 일쑤였습니다. 단언코, 그 강좌에서 무엇을 배우고 알게 되었는지 단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물론, 영서를 꼼꼼하게 다 읽고 강의에 참여하였다면, 좋았겠죠. 그러나 방법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단에서 외국의 최신 이론을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교육의 향방을 탐색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은 나름대로 그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또한 방법론과 교실 사례가 결합하여 이상적인 연구를 만들 수 있다면 교육 현장에 큰 시사점을 건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명이 넘는 학생이 16주간, 맥락도 없는 챕터 분절과 함께 수박 겉핥기 식의 발표를 하는 수업이 과연 대학원 수업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생각해보면, 현장의 교사가 현장의 경험을 강단 이론가인 교수님의 교육 이론과 접목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갖지 못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제가 현실을 잘 모른채, 강단에서의 강의에 대해 지나친 이상 혹은 환상을 가진 채로 대학원에 진학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강의를 통해 제 현장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이론을 만나, 현장의 수학 수업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학기 동안 내내 논문 주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코칭, 주제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 설계 과정에서의 코칭, 실험 실시 과정에서의 코칭이 전부인 강의를 수강하였습니다.
결국, 논문을 한 편 쓰는 것이 목적인 대학원 강좌 수강이 되었고, 여러 사정으로 긴 휴학을 한 후, 코로나19 바이러스 국면에서 등교하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논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수료로 대학원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의미있는 강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강사 선생님 한 분의 강좌들은 제게 좋은 영향을 주었으며, 지도교수님의 수업은 영어로 된 교재만 아니었다면 - 해석의 모호함 때문에 이론을 명징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 훨씬 의미있는 수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남은 것은, 현장의 모습이 이론과 맞부딪히는 파열음의 현장에서 문제 의식 가득한 연구와 실험을 한 것 보다, 그저 현장에 무슨 시사점을 줄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모호한 주제와 모호한 내용을 담은 논문들 뿐입니다.
동료 대학원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내 논문은 비공개 설정하여 제출할 것이다. 논문을 검색하는 이들이 자신의 논문을 볼 수 없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전문교육은, 과연 현장의 문제의식에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