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16. 경제생활보고서(1)
이 글은 미래엔에서 발간하는 '선생님을 위한 수업 혁신 전문지 - 혁신수업 N 2021 가을호 Vol. 11 게이미피케이션' 웹진 및 출간물에 수록된
'경제생활보고서'의 초고입니다.
저는 게이미피케이션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놀이와 교육의 접점을 찾기 쉽지 않은 터, 보통은 놀이의 탈을 쓴 교육이 되어 어린이들의 흥미를 뚝 떨어뜨리거나, 교육은 빠진 놀이가 되어 배움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회 6학년 1학기 2단원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배움 설계 과정에서 성취기준을 분석하는 도중에 문득 찾아온 아이디어가 꽤 괜찮은 듯 싶어, 롤-플레잉 역할놀이 형태로 활동을 구성한 후 일정 수준까지 배우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활동이 필요한 까닭은, 현재 사회과 교과용 도서가 교사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6학년 1학기 교과용 도서는 총 44차시에 걸쳐 성취기준을 달성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운영되는 사회과 교육과정 운영 시간 수는 54차시. 약 10차시 정도의 시간이 교사 재량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작년까지는 정치 쪽에서 시간을 더 사용하였다면, 올해는 경제 쪽에서 시간을 더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라운드 0. Orientation
상황 제시
정처없이 떠돌던 한 사람, 산 좋고 평평한 넓은 땅 보이며 강 흐르고 열매 많은 나무 울창한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 것을 가정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인구밀도가 낮은 터, 바로 옆에 누군가 사는 기색은 없는 곳에 터하고 살기로 합니다. 동굴이었을지 움막이라도 짓고 살았을지는 상상에 맡기고, 우선은 한 곳에 정착한 것만.
설정
어린이들에게 캐릭터를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활동 속 이름과 생김새를 빈 종이에 표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정착하여 할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이니까, 어떻게 먹고 살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택지는 아래 다섯 가지였습니다.
- 농사짓기
- 채집하기
- 사냥하기
- 목축
- 제작하기 (수공업)
다섯 가지 중에 주업과 부업을 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주업은 주로 하며 보내는 일, 부업은 곁들여 하며 보내는 일입니다. 주업으로 수업하는 과업은 2 만큼의 생산을 이루고, 부업으로 수행하는 과업은 1 만큼의 생산을 이룹니다.
활동후기
∨ 부업이라는 말을 몰라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 직업과 부업을 고른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그것을 생산하려고 하는가?’
라운드 1. 물물교환의 시대
생산▶교환▶식사
생산 페이즈
첫 날의 일정을 시작하면 어린이들은 생산 활동을 수행합니다. 자신이 고른 주업과 부업에 따라 쌀(농사), 소(목축), 과일(채집), 물고기(사냥), 생산도구(제작)를, 주업의 생산품은 두 개, 부업의 생산품은 하나를 생산합니다.
▷ 생산품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1 라운드의 생산품은 2 라운드를 마치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썩거나(음식) 닳아서(도구) 없어지는 셈입니다.
▷ 생산도구는 생산력을 1만큼 증가시켜 줍니다. 즉, 한 라운드에 네 개까지 생산할 수 있습니다. 생산도구는 두 개 이상 가질 수 없습니다.
'이웃을 만나다' - 이웃 이벤트 발생
어느 날 문득,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북적북적이는 세계에서야 사람에 치이고 부디끼는게 일상이지만, 아마도 하루 일해 먹고 살던 시절에는 이웃이라는 존재가 생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만난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자신이 생산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이웃이 생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생산할 수 없는 것을 구해볼까?’
▷ 이웃 범위를 설정합니다. 가까운 자리에 인접한 4~5명의 어린이들이 이웃을 이룹니다.
교환 페이즈
생산이 끝난 후, 어린이들은 이웃을 이룬 모둠 안에서 자신의 생산품을 일대일로 교환합니다.
▷ 교환이 끝나면 식사가 이루어짐을 미리 안내합니다.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생산품이 있음을 알아야 교환의 목적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식사 페이즈
교환이 끝나면 생존을 위해 식사합니다. 주식 하나와 부식 하나를 제출하여 식사하였음을 표시합니다. 주식은 쌀, 부식은 소/과일/생선입니다.
▷ 주식과 부식을 모두 먹지 못하면 생명력 1, 둘 중 하나를 먹지 못하면 생명력 0.5를 잃습니다. 초기 생명력은 3입니다.
활동후기
∨ 그렇게 다시 시작한 후 빈 종이에 생산·교환·소유 등을 자유롭게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기록한 것이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양식'이 필요함을 다시 한 번 절감하였고, 이후 생산품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 옆 예시의 어린이는 주업으로 채집, 부업으로 만들기를 고른 듯 합니다. 자신이 채집한 복숭아 두 개 중 하나를 이웃에게 주고 대신 물고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쌀을 확보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생명력을 0.5 잃었습니다.
∨ 옆 어린이는 제대로 된 식사에 실패하였습니다. 교환이 원활치 않았던 탓일겝니다. 아마도 자신의 이웃들 사이에서는 충분한 물자의 생산과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생존을 위해서 소문에 귀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내게 필요한 생산품을 가지고 있다던데...
NOTE
인류 최초의 경제활동이었을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을 턴제의 롤-플레잉 방식 활동으로 경험하여 보았습니다. 농경을 위해 인류가 정착하였는지, 혹은 인류 정착과 무관하게 농경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조금씩 갈리지만, 어찌되었든 잉여생산물은 계급도 만들었으며 교환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물물교환이, 서양은 15세기까지, 우리나라는 18세기까지 주된 거래 방식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우리가 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이고 모험이었을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라운드 2. 모여 거래하다
생산▶교환(확장된 규모)▶식사
'들려오는 소문' - 마을 이벤트 발생
이웃들을 만나 서로의 필요를 조금은 채우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서로 간의 생산 상황에 제한적이기 때문에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웃 중 농사짓는 어린이가 한 사람 뿐이라면 나머지 이웃들은 쌀을 구할 수 없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소문이 들립니다. 저쪽 이웃 마을에는 쌀이 많다더라, 저쪽 마을에는 물건 잘 만드는 이가 있다더라. 소문이 돌고 돌아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회합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둘씩 셋씩 매일같이 만날 수는 없으니 날짜를 정해두고 모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오일장 같은 것이 생겨나는 셈입니다. 물론, 이는 금새 상설시장으로 발전합니다.
▷ 이제 이웃을 확장합니다. 두 모둠 혹은 세 모둠을 묶어 하나의 거래처를 만듭니다. 장날이 열리고, 더 큰 규모에서 거래하게 됩니다.
생산·교환·식사 페이즈
학급 어린이들을 크게 두 모둠으로 나누어 조금 더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식사 페이즈 후, 1라운드 생산품을 버리도록 안내합니다. 매 라운드 종료할 때마다 이전 라운드 생산품을 버리도록 안내합니다.
라운드 3. 선택과 집중
전직▶생산▶교환▶식사
'전직' - 전직 이벤트 발생
더 큰 규모의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굳이 내가 모든 것을 다 생산하려고 할 필요가 없구나,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몰두하여 더 많이 생산한 후 이를 가지고 나가서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여 오는 게 낫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 생산 페이즈 전에 전직 페이즈가 추가됩니다.
전직 페이즈
생산 페이즈 전, 전직 페이즈를 가집니다. 어린이들은 아래와 같이 자신의 할 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 부업에 쏟을 생산력을 주업에 모두 쏟도록 변경할 수 있습니다. 즉, 주업이 직업으로 변경되면서 더 이상 부업 생산품은 없이 직업 관련 생산품만 세 개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주업으로 농사, 부업으로 제작을 수행하던 어린이는 쌀 2 단위와 생산도구 1 단위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농사를 직업으로 바꾸면 쌀만 3 단위를 생산하게 됩니다.
▷ 주업과 부업의 할 일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상황 변화에 조금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위의 예에서, 어린이가 주업과 부업을 바꾸면 이제 생산도구 2 단위와 쌀 1 단위를 생산하게 됩니다.
생산·교환·식사 페이즈
전직 페이즈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 활기찬 거래가 이루어지며 생산품은 조금 더 풍족하게 넘쳐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 두 라운드의 활동을 한 차시 동안, 그것도 실시간 쌍방향 원격 툴(ZOOM)을 활용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경제 생활 자체가 단순한 편이라 가능하였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활동 당시에는 ‘유통 기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잉여 생산품을 계속 쌓아가며 자급자족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생명력 유지만 신경 쓰면 된다고 생각하였고 필요는 충분히 채워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거래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간에 유통 기한 개념을 도입하였고 이는 조금 더 활발한 활동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NOTE
지금도 남아있는 오일장의 흔적은 교환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날을 정해 모여들면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야 서양은 농노제를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의 운영, 우리나라는 왕실의 수요를 채우는 목적 아래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필요를 확인하면서 공급이 생기고, 거래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라운드 4. 상인과 수공업
전직(+상인, 제작마스터)▶생산▶교환(개인/상인거래)▶식사
'거래만을 위한 직업의 탄생' - 상인/제작 마스터 등장 이벤트 발생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를 이루는 장소, 시장.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내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지 확인하는 일은 고되기 짝이 없습니다. 막상 찾아 내더라도 내가 가진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교환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정보는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제한적입니다.
이런 상황이 기회임을 깨닫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굳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환할 필요가 무엇일까. 그냥 내가 모든 것을 다 사들이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면서 그 과정에서 이익을 취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누군가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을 사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사들이고자 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주문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벤트로 인해 새로운 규칙이 생긴 전직 페이즈
전직 페이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새로 등장합니다.
▷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산품에 대하여 일대일 거래 경험이 있는 어린이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상인으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상인은 생산할 수 없고 거래에만 참여합니다. 어린이들은 개인 간 거래와 상인과의 거래를 병행할 수 있습니다.
▷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드는 일을 주업(직업)으로 해 온 어린이들은 제작 마스터라는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작 마스터는 지금까지의 일반 생산도구보다 내구성이 좋아 한 라운드 더 활용할 수 있는 특별 생산도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생산·교환·식사 페이즈
▷ 이전 라운드에 전직하였더라도, 이번 라운드에 새롭게 전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상인으로 전직한 어린이들은 다시 전직할 수 없고 계속 상인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합니다.
교환 페이즈에서 일대일로 교환해 왔는데(1 라운드) 앞으로는 필요에 따라 물품 수를 서로 다르게 하여 거래할 수 있음을 안내합니다.
다음 라운드 변동사항 안내
상인 어린이의 질문과 생각을 시간 말미에 공유하면서, 다음 시간부터 상인은 거래를 위한 ‘약속증서’를 발행하게 됨을 안내하였습니다. 즉, 상인은 생산품을 받을 때 댓가로 줄 것이 없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오면 약속된 물품을 내어 주겠다’는 약속증서(즉, 어음)를 발급할 수 있게 됩니다. 고대로부터 금화와 은화가 가진 가치를 교환의 매개로 사용해왔지만, 이제 가치 없어 보이는 약속이 지급을 보증하게 되었고 이는 자본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활동후기
∨ 이 날의 활동도 실시간 쌍방향 원격 툴 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직까지는 활동의 복잡도가 크지 않아, 한 라운드는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 다음 라운드는 본격적인 활동 정도로 하여 한 차시 활동을 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만... 한 번 쯤은 진행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패들렛에 자신의 현재 상황 –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생명력은 얼마인지 - 을 정리하는 활동을 먼저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습니다.
∨ 마찬가지로 활동을 해 나가면서 꼼꼼하게 체크하지 않는 어린이들이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덕택에 주어진 규칙을 정확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 이는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록하고 체크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세밀한 기록인가. 물론, 이어지는 활동 중에 계속 실수들이 드러날테고 그것을 바로잡거나 체크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 배움의 목적은 아닙니다. 기록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어린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이 활동을 통해 배운 것과 생각한 것을 적도록 하는 기록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선가는 전반적인 상황을 체크할 필요가 닥치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경제생활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일일이 기록하게 하였던 것을 이 쯤에서 자연스럽게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생산하고, 바꾸고, 사용했는가를 적기보다는, 실물 종이 등을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곧 약속증서나 지폐를 사용하게 될테니...
∨ 거래 페이즈 중간에 상인으로 전직한 어린이가 ‘사고 팔기 위한 충분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아 거래가 어렵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보라고 말하였는데, 거래 페이즈 종료 후 물으니 ‘사고 팔게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고 파는 일을 하기 위해 상인에게 필요한 수단ㅇㅣ 바로 ‘신용’임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용 수단을 어린이들 스스로 떠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NOTE
조선 후기 송상이니 만상이니 하는 명칭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토대로 무역에 나서던 상인 군을 일컫습니다. 오일장을 주유하며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상품을 옮겨 팔던 보부상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도 조선 후기 시대입니다. 하지만 상업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나아가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허생전은 우리나라의 취약한 상업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상업 자본의 형성이 수공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서양 경제 시스템의 모습 임을 더불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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