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9. 특별한 경험
장래희망을 구체적으로 가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언저리였던 듯 싶습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1987년의 학교 도서관에서, 저는 방과 후에 도서관의 역사책들을 부지런히 읽어갔습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정확한 책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빨강색 표지의 일제 36년 강점의 역사를 다루었던 36권짜리 시리즈를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고대 이집트의 권력 투쟁을 다루었던 책은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그저 읽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신채호 선생의 전기를 통해 이러한 꿈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상고사’를 사서, 정말 무슨 소린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읽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CA로 역사연구반을 선택해서, 당시에는 조금 센세이션했던 책인 ‘바로 보는 우리 역사’ 같은 류의책을 젊은 역사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사학과로 진로를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부모님과 뜻이 맞지 않는 바람에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영어 듣기가 되지 않았던 저는, 이를 노력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대학을 새로 가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3년이나 다녔는데, 아마도 문학을 좋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진학 당시 ‘문학반’ 학회 활동을 했습니다. 한 주에 한 편,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세미나하는 학회였는데,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함께 세미나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가장 핫한 작가였던 이문열 작가의 책을 미출판작까지 모두 구해 읽기도 하였던 기억, 김승옥 작가의 매력에 홀딱 빠져 마찬가지로 항상 탐독하던 기억도 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로 혜성(!)같이 등장하였던 공지영 작가의 작품에 반했다가, 이어지는 작품들에 굉장히 실망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동기가 있어, 영화연구 소모임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물론, 모임은 지속되지 못했지만, 덕택에 대학 1, 2학년 때는 영화 잡지를 보면서 좋다는 영화는 개봉관을 찾아가며 보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 때, 평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 꿈은 유효합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둔 후에는, 다시 입시를 치루고 법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고시 준비하는 (나어린) 동기들을 따라 고시 기숙사에서 무위도식하기도 하고, 신림동에 출퇴근하며 짧게나마 강의를 듣기도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추억은 학회 활동이 주었습니다. ‘법철학회’ 학회에 가입하였는데, 헤겔 법철학을 실제로 다루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철학적 사유를 두고 한 주에 한 번씩 토론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봐야 [철학과 굴뚝 청소부],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같은 가독성 떨어지는 책들이나,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같은 교양 서적으로 해가는 세미나였지만, 20대의 초중반을 지내는 젊은이들에게는 꽤나 진지하고 엄숙하게 치루었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공 수업을 좀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딱 졸업할 만큼의 학점만을 이수하였고, 교양 과목을 더 열심히 찾아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2만명의 재학생을 자랑하는 종합대학의 교양 과목 수업들은 퀄리티가 좋은 편이어서, 여러 수업들을 통해 많은 지적 자극을 받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래도 헌법 수업이나 물/채권법 수업, 형법, 민사소송법 수업은 즐겁게 들었던 - 학점은 그냥저냥이었지만 - 기억도 납니다.
학교의 배움에 집중할 수 없었던 어려움은, 학비와 생활비와 관련된 것도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리도 열심히 사셨지만 항상 빗나간 목적지때문에 어려움을 겪으셨고, 덕택에 개인 과외를 이어가며 제 쓸 학비와 생활비를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가리지 않고 과외를 이어갔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서 수학 교과 과외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년도 가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서 입시를 앞둔 학생들을 주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너무 많은, 그리고 항상 수학을 어려워하고 자신없어하던 학생들을 맡았던 것이 아마 지금 교실에서 저희 반 어린이들을 조금은 더 전문적으로 대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듯 합니다. 2분의 1 더하기 3분의 1을 5분의 2로 계산하던 고 3 학생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도, 공·사교육에서의 수학 교육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보드게임에 홀딱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연히 접한 보드게임의 충격이 워낙 커서, 기존 대학생의 놀이 문화 - 노래방, 피시방, 당구장, 영화 감상, 음주와 주정 - 에 크게 염증을 느끼던 저는 다이나믹한 어른 놀이의 대안으로써 보드게임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직접 체험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집에 보드게임이 어느 순간에 책장 두 세 개로는 다 차지 않게 되었고, 이백개 언저리를 맞추기 위해그렇게나 뻔질나게 구매한 것을 중고로 파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였습니다.
모임도 많이 다니고, 룰북 번역도 이것저것 해 보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은 한글판 보드게임이 워낙 많지만, 당시에는 한글판 보드게임은 손가락으로 꼽는 정도였고, 독일어판 보드게임을 영어로 번역한 파일을 구해 그걸 한글로 번역하여 인터넷에서 공유하며 보드게임을 해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교대를 또 한 번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교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위해 조금 더 신경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 들었던 ‘동서미술’ 수업이 지금도 굉장히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미술 관련 책들을 구해 읽고, 현장 답사 - 특히 절 - 를 다니면서 직접 보고 배운 것을 되새겨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술 그림 솜씨는 많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자라나가고 있어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 관계. 세 군데의 대학을 다니면서 과 친구들과, 또 과 학회 동기 선후배들과 그렇게 다양한 인간관계를 겪었지만, 생각보다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교대 생활을 통해 새롭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큰 파열음은 없었지만, 실망하고 실망을 주며,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도 했던 30대 중반의 경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는 모두가 내 생각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경험도 얻었습니다.
교대를 다니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경험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할 때는, 휴가 때 그냥 집에 있으면서 머물기 바빴는데, 돈이 궁하던 교대생 시절에 오히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바쁠 때는 서울 4대문 안에, 조금 한가하면 당일이든 1박 2일이든 가깝고 먼 곳을 다녀오곤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통영/여수/순천/목포를 당일로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하면 다들 기함하더군요. 덕택에 제 아반떼는 1년에 2만 킬로미터씩 다녀 지금은 골골거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제주도에 많이 꽂혀(!) 있습니다. 막내를 낳으면서 복지포인트를 300점 받았고, 그 덕택에 2015년에 난생 처음으로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매년 한 번 씩 온가족이 제주도를 다녀오곤 합니다. 갈 때는 항상 5박 이상은 하는 듯 합니다. 처음에는 5박으로 시작해서, 7박, 9박, 16박, 뭐 이렇게 길게 다녀오게 됩니다. 가서 올레길도 걷고, 오름에도 오르고, 시장도 찾아다니고, 바다도 찾아다니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테마공원도 찾아다니고,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 너무 좋아서 또 가보고 싶은 곳, 가리지않고 여기저기 가게 됩니다.
그리고 흥미있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작년에는 수학 마스터클래스 연수와 인공지능 연수에 참여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 하시는 연수도, 다른 분들 관심 덜한 연수도, 다른 분들관심 없는 연수도, 이것저것 기웃거리곤 합니다. 책을, 다양하게 읽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교육 분야의 책을 많이 보지만, 사고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교육 이외 분야의 책을 접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곤 합니다. 특히, 1차 저작물을 접하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요약 정리된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요약 정리한 그 책을 바로 읽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타인의 눈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다고나 할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로,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소개하는 곳을 다 가보고 싶어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항상 고려하곤 합니다. 경주의 장항리석탑같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느꼈던 그 놀라움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서 시간 날 때마다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래서, 교사의 경험은, 우리 학급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경험의 기저가 되어 줄 것입니다.
교사야말로, 특히 초등학교 교사야말로, 새로운 경험에 도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 하는 것, 자신이 인정받고 있는 분야 이외에,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접하고 생각하고 이루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학급의 배움을 위한 많은 자료들이 이미 정보의 바다에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에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필요합니다. 그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필요합니다. 좋은 자료라고그것을 그대로 쓴다면, 어느 순간 배움의 계기를 주는 교사와 배움을 관리하는 교사는 구분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온라인 등교 상황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교사의 수업을 제공하고 나머지 교사들은 학생 관리만 하도록 하자는, 교육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실제로 나오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임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교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너무나도 빙빙 돌아온 인생. 그러나 이렇게 꾸불꾸불헤메고 다니면서 쌓은 경험들이 지금 제가 살아가는 교실에서 함께 지내는 어린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많은 선생님들이,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앎과 배움, 경험의 도전을 끝까지 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험의 도전을 경험하는 것까지,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배움의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