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7. 특별한 우연
학원에서 수학을 배우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 다니기 시작한,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 씩 영어 교과서의 내용을 가르쳐주던 3만 5천원짜리 속셈학원에는, 사실 수학 클래스도 있었습니다. 영어를 다니던 학원 친구들은 수학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제게 수학도 같이 하자고 꼬드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학은 혼자서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들의 말을 못들은척 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기는 학원 크리스마스 파티 자리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속셈학원에서는 학원 옆 즉석떡볶이 집에서 출장(!) 나오셔서 강의실 떡볶이 파티를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학년 별로 강의실에 모여 앉아 떡볶이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 건너편에 못보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긴 생머리에 은색 안경을 쓰고 앉아있던 갸냘픈 느낌의 한 사람. 옆 친구에게 물었더니, 학원 수학 선생님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바로 수학도 등록하였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계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모든 우연은, 사실 이유가 필요했던 사람에게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니까요. 사실 혼자서 수학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을 줄곧 하면서도 생각보다 지지부진하던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랐지만, 이상형(이라고 생각하던 모습)에 가까운 학원 수학 선생님이 특별한 우연을 만들어 준 것이죠.
하지만, 그 선생님은 3월을 시작하면서 금새 그만 두셨습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이셨던 듯 싶습니다. 어쨌든, 그 선생님과 배우면서 제 수학의 배움에 큰 임팩트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차방정식 단원의 최고수준 문제를 풀던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문제는,
엑스 플러스 엑스 분의 1이 5일 때, 루트 엑스 플러스 루트 엑스 분의 1의 값은? (단, 엑스는 0보다 크다)
당시 학원 수업은, 여타 수학 수업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념을 설명하고 과제를 내 주고, 과제를 풀어주고 또 과제를 내 주고, 내준 과제를 풀어주고 또 과제를 내주고... 그렇게 생각하면 참 수학 강의 방식도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걸 벗어버려야 수학 배움이 다이나믹해질텐데... 어쨌든. 앞선 문제들을 계속 풀어주시다가, 선생님께서 위의 문제를 우리들보고 한 번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열 두 명의 학생들은 문제를 풀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차피 답안지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 이것도 참 변하지 않습니다. 학원은 답안지를 모두 뜯어가죠. 참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 문제에만 집중하였는데,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워낙 유형화된 문제라 쉽게 풀지만, 그 당시에는 엑스의 값을 구해야한다는 생각만 했지, 완전제곱식의 변형식을 활용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엑스를 구하기 위해 근의 공식에 밀어 넣는데, 엑스의 값은 루트로 나오고, 그걸 다시 루트에 밀어넣으니, 중 3 수준에서는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은 금새 포기했지만, 저와 학원 팸을 이루었던 친구들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우리 힘으로 풀어보겠다며.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저 포함 몇 명의 친구들은 선생님의 강의를 두 귀로 흘리면서 이 문제를 골몰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서도 이 문제를 골몰하였습니다. 풀어낸 것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였던 듯 싶습니다. 엑스를 구하는게 아니라, 루트 엑스 더하기 루트 엑스를 한 번에 구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우연히 찾아온 것은, 너댓장의 연습장에 근의 공식 풀이를 하염없이 반복하고 반복한 이후였습니다.
이후에도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삼각비 문제 중에, 부채꼴 안에 원이 내접해 있는 도형에서 넓이를 구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풀었구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부여잡고 있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은 배움의 방식이라고들 여기는 듯 합니다. 수학은 많이 풀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수학의 배움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문제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 얼핏 미련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최상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어려운 하나의 문제를 스스로 부여잡은 채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며 배운 것들을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재배열해가는 사고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며,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성취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 우연을 가장하고 찾아옵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친구의 교회 수련회를 따라 갔던 기억이 납니다. 동양공전 옆 새소망 소년의집이라는 복지시설을 빌려, 뜨뜻한 방에서 좋은 밥 먹으면서 잘 놀다 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강사 목사님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은 대학교 4년 내내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두 번 정도 두루마기가 유행이던 때가 오더라. 한참 유행하는 것을 따라하려다보면 아무리 빨라도 반 발 늦을 수 밖에 없는데, 그냥 내 패션을 유지하면서 지내니까 어느 순간엔가는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더라, 는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교직에 와서도 남들 좋다고 하는 것에 그렇게 큰 관심이 안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롯이 제 관심은, 지금 우리 교실에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새로운 것을 접한 후 이것을 우리 교실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는, 필요와는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강사 목사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 중에, 자신이 공부하던 방식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공부할 때에는, 맞은 문제가 아니라 틀린 문제에 빨강색 동그라미를 쳤었다는 말씀, 왜냐하면 바로 그 동그라미가 다시 살펴보며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을 공부한 후 두 번째 공부할 때는 동그라미 친 문제만 다시 풀었고, 또 틀리면 동그라미 하나 더, 맞으면 동그라미를 지우는 방식으로 공부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을 다시 생각했던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였습니다. 입학한 고등학교는 상위권 성적의 학생에게 의무적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강제하였습니다.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게 되면 더이상 속셈학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때쯤에는 학원엘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학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학원 친구들과 선생님이 좋아서였지, 제 배움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학교 야간 자율학습이 핑계가 되어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얼마 전 들었던 강사 목사님의 공부 방법을 제 수학 공부에 적용해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에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학습 방법이 제 학창 시절의 배움을 조금 더 좋은 결과물로 만들어 준 셈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런 부분을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보통은, 이런저런 방법과 절차를 안내받느라 바쁠테니까요.
이 이야기의 지향은, 방법이 아닙니다. 중 2 겨울에서 고 1 넘어가는 평범한 남학생이, 스스로의 고민과 생각으로 갈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도 했는데 너는 왜 못하냐'라는 뉘앙스를 펼치시는 듯 합니다. 그리고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론을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뿌리곤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 더 자유롭게 스스로에 대해 사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조언은 있을지언정, 조언이 조언의 역할만을 할 수 있는. 강요나 의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 많은 결정적인 시도들은 누군가의 특별한 조언이나 요구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지내고 있을 뿐이었는데,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조금 더 여유롭게 이런저런 말과 행동에 귀 기울이고 주목할 수 있었던 상황에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의 문제를 두어시간 고민하고 생각하며 풀어가는 경험은, 따라서 스스로에게로부터 와야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강요나 요구로 이루어질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학생의 수준과 성향과 지향에 따라 다른 지점일테니까요.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에게 들은 한 마디 조언, 같은 것이 제 교실 학생들의 삶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도록, 우리 학생들에게 조금 더 자유로운 선택과 가능성의 여지가 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보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