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World] 7. 언플러그드 SW 보드게임
2015 개정 교육과정에 SW교육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초등학교 6년 통틀어 17시간. 1년에 17시간씩도 아니고, 통틀어 열 일곱 시간을 가지고 초등학교 현장이 아주 들썩들썩 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한 SW교육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이를 현장에서 구현해야할지도 모호하지만, 어쨌든 올해부터 6학년 교실에서는 SW교육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기왕에 도입할 것이라면 먼저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철학을 공유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초등학교에 들어오는 것 중에 구성원들의 동의를 묻는 과정이나 절차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기도 합니다.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SW교육의 철학은 '절차적 사고'의 필요성이며, 이를 초등학교 수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보드게임이라, 여기저기 연수를 다니는 와중에 보드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또 함께 게임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절차적 사고 보드게임
"(거의 모든) 보드게임은 절차적 사고의 예시"
그저 보드게임만 재미나게 즐겨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절차적 사고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보드게임은 게임 속 목적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해진 규칙을 토대로 각자의 절차대로 플레이합니다.
물론, 보드게임을 한다고 해서 절차적 사고 능력이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차적 사고 능력을 키우기 위한 별도의 교육과 학습이 아이들의 능력을 키워주지도 못합니다. 의도해도 쉽지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쉽게 되지 않는 것, 그저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즐기고 경험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필요할 때, 스스로 찾아서 알아서 하겠지요. 아이들에 대한 믿음만 좀 가지면 될텐데... 어른들이 참 그것을 못합니다. 각설하고.
달무티 der Grosse Dalmuti 보드게임
어디가나, 누구를 만나든지, 가장 먼저 안내하는 보드게임이 달무티 보드게임입니다.
달무티 보드게임은 '자기 손에 든 카드를 가장 먼저 버린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련의 순서를 고려하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같은 방식의 카드 버리기 보드게임인 우노 보드게임이 다른 플레이어에 의한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보드게임이라면, 달무티 보드게임은 다른 플레이어의 영향력이 현저히 적습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에는 모두의 카드가 가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변수가 많아진다면, 조금씩 플레이가 진행되고 플레이어들의 카드가 버려지면서 변수는 줄어들고 예측은 가능해집니다. 가장 먼저 카드를 손에서 털어내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예측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어떤 순서(절차)에 따라 버릴 때 가장 유리할지 헤아리게 됩니다.
절차적 사고가 그저 과업을 잘게 쪼개고 그것을 일련의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이라고만 한다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과업을 수행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과연 어른들은 그것을 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가지기 때문입니다.
절차적 사고는, 주어진 일련의 상황에서 그것이 나름대로의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고려하여 그것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드는 찰나적인 것입니다. 매일 학습 계획을 수립하느라 학습하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절차적 사고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연습되어야 하는 부분이며, 달무티 보드게임은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카드를 어떻게 버려야 가장 효율적으로 - 가장 먼저 - 카드를 버릴 수 있을지 생각하도록 해주는 절차적 사고 보드게임입니다.
도미니언 Dominion 보드게임
도미니언 보드게임은 덱빌딩 장르의 보드게임입니다. 덱빌딩 장르는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손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플레이 카드 더미(덱)을 만드는 게임을 말합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왕국의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주어진 자원(토지와 돈)을 활용하여 가장 넓은 영지를 만드는 것. 이를 위하여 플레이어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기능을 사들이고, 그렇게 구입한 카드들만 가지고 게임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카드를 사들이는 것에도 효율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카드들이 가진 기능은 서로 연결될 때 더 큰 효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고 해서 무작정 사들이면 자신이 가진 플레이 카드 더미가 너무 방대해져서, 막상 필요한 카드들이 n분의 1 중 작은 1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슬림하게 플레이 카드 더미를 유지하면 게임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총 25종류의 기능 카드 중에 무작위로 10종류를 골라 진행하는 도미니언 보드게임. 아이들은 고른 10종류의 카드를 쓰윽 보면서 자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카드 간 연결 - 콤보 - 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면서 게임을 진행합니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대!'라며 던져주시면 절대 아이들끼리는 익힐 수 없는 보드게임이며, 보드게임을 오래도록 즐겨보신 분들이 아니라면 혼자서 규칙을 익히기는 어려운 보드게임이지만, 규칙을 잘 아는 누군가가 옆에서 한 게임 하는 과정만 도와주면 그 누구라도 다음 플레이는 쉽게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며, 승리를 위해 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효율적 - 절차적 - 사고를 필요로 하는 보드게임입니다.
보난자 Bohnanza 보드게임
보난자 보드게임은 콩 거두는 보드게임입니다. 절차적 사고 보다는 말빨과 협상력이 더 중요한 보드게임이지만, 콩을 거두기 위해서 자신의 손에 든 카드와 자신이 더미에서 가지고 온 카드, 그리고 자신의 밭에 심은 카드 간의 활용 순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보드게임입니다.
위 두 보드게임보다는 조금 재미가 떨어지는 듯하다는 개인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이 보드게임을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ducational Programing Language
프로그래밍 언어는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사실 컴퓨터가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정확하게 컴퓨터의 언어인 이진수로 바꾸기 좋도록 단순화시킨 명령어와 기호의 합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아직 우리말도 잘 안되는 - 쿨럭 - 아이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려줄 수 없으니 이걸 더 단순화시켜서 블록 기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든 것이 바로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는 스크래치, 엔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크래치, 엔트리로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실제 세상에서 구현되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화면 속 고양이가 뛰어놀고 로봇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만들 뿐입니다. 순차, 반복, 조건으로 단순화 된 프로그래밍 구조는 그래서 아이들의 학습 의욕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좋아한다고 해서 블록기반 프로그래밍 언어 도구까지 즐거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건 큰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의 학습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구현하고 바꿀 수 있는 광경이고 장면일 것입니다. 그걸 할 수 없는 나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EPL은 중등 교육과정으로 밀어냈으면 좋겠습니다.
간단한 과정을 초등에서 교육시키고,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중등에서 교육시킨다는 흐름을 좀 바꾸면 좋겠습니다. 초등에서 SW교육을 하고 싶다면, 방법론적인 접근 이전에 실생활에서 이것이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실생활 기반의 잘 구성된 과제물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에는 그게 더 나을테니까요.
리코셰 로봇 Ricochte Robot 보드게임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EPL을 대체할 수 있는 보드게임은 없습니다. 엔트리봇이라는 EPL 이식 보드게임을 교육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솔직히 재미 없습니다. 세상에 즐거운 보드게임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교육용'으로 보드게임을 통한 '학습'을 할 필요까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리코셰 로봇이 EPL을 통해서 안내하고자 하는 '순차', '반복', '조건' 구조를 잘 드러내고 있는 보드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냥 '순차'가 명확하게, '조건'이 살짝 드러나는 보드게임이지만.
리코셰 로봇 보드게임은 행동 로봇을 목표 지점에 가져다 놓기 위하여 순차적으로 움직이는 보드게임입니다. 그런데 이 로봇을 옮겨두기 위해 다른 로봇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경로가 가장 효율적인 학생이 보상을 받는 게임입니다.
그래서 리코셰 로봇 보드게임도 효율성을 가장 강조하는 보드게임이라는 설명이 정확할 듯 합니다.
연수하면서 같이 플레이하신 선생님들 평은, 규칙은 단순한데 아이들에게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줄 수 능력이 교사에게 없어 난감한 보드게임이다, 였습니다.
프로그래밍 보드게임
피라니아! 보드게임
예전에 '피라냐 페드로!'라는 이름의 독일어판으로 출시되었던 보드게임인데, 한글판으로 재출시 되었습니다.
섬에 살고 있는 페드로가 섬 바깥으로 나오게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이동카드 중 한 장을 내서 페드로를 움직이게 하는데, 페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게, 페드로가 피라니아에 물리지 않게 이동카드의 이동 방향을 잘 결정해야 합니다.
보드게임 중, 프로그래밍 장르의 게임이 있습니다. 플레이어 자신의 이동 경로를 미리 정해놓은 후,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들의 말을 움직이는데, 그 가운데 서로의 생각이 겹치거나 엇갈릴 때의 미묘한 우연성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장르입니다.
피라니아! 보드게임도 그런 프로그래밍 보드게임입니다. 학생들은 다른 친구들이 어떤 이동카드를 내었을지 추론하면서 자신의 이동카드를 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페드로를 어려움 가운데 빠뜨리지 않게 할 수가 있게 되겠지요. 간단한 류의 프로그래밍 보드게임입니다.
콜트 익스프레스 Colt Express 보드게임
콜트 익스프레스 보드게임은 기차 모양의 3D 게임판 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더 즐겁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래밍 류의 보드게임입니다. 플레이어들은 해당 라운드 카드에서 제시하는 액션 카드를 순서대로 쌓아둡니다. 그렇게 만든 액션 카드 더미를 펼치면서 플레이를 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두가 동상이몽을 꾸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플레이가 벌어질 지 모릅니다. 예컨대, 지금 머무는 기차 칸에서 약탈품을 훔칠 생각으로 액션 카드를 제출하였는데, 다른 플레이어들의 생각과 다른 덕에 그만 보안관을 옆에 두고 훔치기를 감행할 수도 있지요. 모두가 순서대로 액션을 결정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를 고려하여 액션 카드를 사용해야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피라니아! 보드게임이 6학년 아이들 수준에서 조금 쉽다면, 콜트 익스프레스 보드게임은 조금 난이도가 있고 자잘하게 설명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 보드게임이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금방 적응해서 금새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보랠리 보드게임과 히말라야 보드게임
위에 소개하였던 두 보드게임이 모든 플레이어가 함께 프로그래밍을 수행한다면, 로보랠리 보드게임과 히말라야 보드게임은 내 로봇 또는 내 상단 만을 프로그래밍하여 액션을 수행하는 보드게임입니다.
두 보드게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할 수 없는 이유는, 둘 다 시간이 꽤 오래걸리는 - 두 시간 - 보드게임이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보드게임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보랠리 보드게임은 위에 소개하였던 달무티 보드게임을 디자인한 리차드 가필드라는 디자이너가 만든 보드게임입니다. 수학을 전공하였다는 디자이너 솜씨 답게 로보랠리 보드게임도 로봇 경주를 위해서 이런저런 변수를 고려하여야 하는 로봇 움직임의 프로그래밍이 묘미입니다.
히말라야 보드게임은 히말라야 산맥에 살고 있는 부족과 상단 - 물건을 사고파는 - 이야기입니다. 플레이어는 상단이 되어, 부족 마을에서 물건을 구해서 다른 부족이 필요로 하는 주문대로 물건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사람 생각이 다 거기에서 거기인지라, 꼭 내가 노리는 상품을 누군가가 먼저 가로채어갑니다. 여섯 번의 액션을 한 번에 프로그래밍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변수를 다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초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아이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줄 수 있는가의 여부인 듯 합니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주려면, 잘 구성되고 잘 짜여진 것이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한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교사는 두 시간, 세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