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사회] 04. 조선 후기 경제 시스템의 변화
대동법의 시행은 조선 후기 사회가 농업 중심의 경제 시스템에서 시장 경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조/용/조 제도에 의한 과세는 중세적인 물물교환 경제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더라도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현물로 납부하는 세금 제도 - 용역도, 특산품도 - 는 화폐 경제를 기반으로 한 시장 경제를 필요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대동법으로 인한 토지세 기반의 미곡 납부를 조세 제도로 운영하게 되면서, 비로소 시장 경제 시스템이 조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일반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대동미를 받고, 이 대동미를 활용하여 정부에 필요한 비용으로 지출하였습니다.
대동법 전에는 예컨대 성벽을 지으려면 각 지역으로부터 용역을 위하여 백성들을 직접 차출하여 왔는데, 대동법 이후에는 거두어들인 대동미를 노임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용역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동법은 조선 사회에 노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임노동자의 출현을 야기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왕실과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특산품을 대동법 전에는 직접 공납받았다면, 대동법 이후에는 공인을 통해 구매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대동법 전의 방납 제도는, 공납의 의무를 가진 백성들이 특산품을 직접 구하여 정부에 납세하는 것이었다면, 대동법 후의 공인은 정부를 대리해서 공납물을 구매하는 것으로 백성들은 공납물의 구매 의무를 대동미의 납부를 통해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노동자의 본격적인 출현과 공인의 활약은 조선 후기 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임노동자의 출현을 대동법으로만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 후기 농업 경영 시스템의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앙법은, 벼의 수확량을 극적으로 늘려주게 되었고, 또한 남부 지역에서는 보리와 벼의 2모작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앙법은 모판에서 모를 낸 후에 물 댄 논에 모를 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농사 방법으로, 씨를 직접 논에 뿌리는 직파법보다 더 안전하게 벼를 키워낼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모판에 모를 내는 시기까지, 논을 보리밭으로 사용하면서 1년 2모작을 할 수 있는 기반도 되었습니다.
이앙법의 사용은 단위 면적당 적은 노동력으로도 더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였기 때문에, 농촌 일손을 많이 덜어낼 수 있게 하였고, 덕택에 소작농들이 소작지를 잃고 농촌 생활 근거지를 떠나 도시로 올라오게 되는 이유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도시에 자리잡은 사람들이 임노동자가 되어 노역을 담당하게 되고,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임노동자들이 노역에 투입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됩니다.
대동법의 시행과 맞물려 왕실의 필요물품을 구해오는 공인들은, 점차로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해갑니다. 본디 조선 사회는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업 활동을 노예 직전의 가장 마지막 사람 하는 일로 여기던 사회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인들이 정부 구매를 대행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상업 활동을 확장해가면서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되는 기틀을 제공합니다.
수도 한양에는 시전이 있었고, 지역별로 간간히 비정기 시장이 들어서긴 했지만,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시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숙종 연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역별로 알려진 많은 오일장들의 시작을 이때로 보는 것은, 따라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시장에서는 여러 지역의 특산품뿐만 아니라, 이앙법 등에 의해 바뀐 농업 시스템에 기인한 잉여 농산물들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필요 이상의 물건이 시장에서 유통되면서 본격적으로 화폐가 거래의 편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숙종 연간의 상평통보는 이후 조선 상업 활동의 주요 매개물이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평범한 양반 계층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잃으면서 점차로 그 위세를 조금씩 잃어가는데, 오히려 농사를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해가거나 상업 활동으로 말미암아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해가는 평민 계층의 세력은 무시못할 수준이 되어갑니다.
이러한 평민 계층이 다양하게 자신의 문화 역량을 펼쳐가는 것을 18세기 이후의 다양한 문화적 결과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