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벌
상벌
상벌제가 가지고 있는 철학의 가장 밑바닥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가장 짙게 깔려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종을 흔든 직후 먹이를 주면, 종소리만 들려도 침을 흘리는 개.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실험은 교육 현장에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의 상벌제는 그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빈 포도알이 그려진 포도송이를 나누어 받았습니다. 총 일흔 일곱 칸. 분명히 일흔 여덟 개를 받았는데, 네 개를 분실하여 세 칸이 부족한 상태로 제출하였지만, 충분히 많이 붙인 스티커라 '착한 어린이상' 상장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스티커는 받아쓰기 점수가 좋을 때도 받았고, 학급에서 긍정적인 일을 할 때도 받았습니다. 그 포도송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받았던 상도 마찬가지로 애지중지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포도송이가 변형된 형태로 교실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급 온도계가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는 순간 라면 파티를 한다는 것을 안내하는 그런 표지판. 투명 플라스틱 병에 색깔 공을 모아가면서 파티를 준비하는 그런 장치들.
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보다는 벌이 더 확실하게 효과를 거둔다고 생각하였던지, 그렇게도 많이 맞았던 기억이 학창생활 내내의 기억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상과 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알피 콘의 [경쟁에 반대한다]라는 책에는 이런 상황이 나옵니다.
(전략) ... 7세에서 11세... 소녀들... 콜라주 작품... 몇 명은 상을 타기 위해 경쟁하도록 했고, 몇몇에겐 보상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7명의 예술가에게... 평가하게... "상을 위해 경쟁하다록 한 실험 그룹... 독창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경쟁하도록 유도된 아이들의 작품은 자발성, 복합성, 다양성 면에서 부족함이 드러났다... 경연이라는 제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라운드가 진행될 수록 참가자들의 정서는 메마르며, 쇼팽의 연주곡을 위한 감수성은 경연에 별 필요가 없어진다."
알피 콘, 경쟁에 반대한다, 78쪽
위 책에서는 경쟁이 가지고 오는 결과의 현저한 수준 저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경쟁이 목적하는 것이 상에 대한 것이다보니 우리는 상이 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벌은 어떻습니까. 과연 행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벌은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까요? 사춘기 시절을 쉽게, 흔히 규정짓는 '반항'이라는 단어는 혹시 쉽게 주어진 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학년 초에 아이들과 만나서, 상과 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합니다. 1년간, 잘 하는 행동에 대한 상은 없다라고 못박고 시작합니다. 상은, 스스로에게 찾아오는 만족감과 성취감이면 족하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상에 대한 생각은, 결국 스스로의 성장과 발전을 통하여 얻는 내적인 것입니다. 상으로 주어지는 이벤트를 위한 바르고 성실함은, 결국 바름과 성실함이 내면화되지 않으면 이벤트만 남을 뿐입니다.
벌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문제 행동에 대해 학급 보드게임을 금지한다거나 쉬는 시간에 쉬지 못하게 하는 그런 벌은, 학생의 문제 행동을 내적으로 제어하기 보다는 표면적인 금지가 될 가능성이 더 클 뿐만 아니라 학생을 심정적으로 힘들게 할 여지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자라면 더 이상 문제 행동을 벌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하지요.
다른 한 편으로는, 과연 교사가 학생들의 그런 행동을 금지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습니다. 교사가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권리를 빼앗을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저는 개인적으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에게도 선생님은 너희에게 무언가를 금지하고 무언가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학년 초에 미리 말해둡니다.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임을 누구나 다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상과 벌이 남용되는 경우에 우리는 더 큰 문제를 안게 됩니다. 6학년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내다보면 지난 선생님에 대해서, 저희 선생님은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무조건 제가 잘못했다고 저만 혼내셔서 속상했어요, 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도 작용하지만, 그것 만큼이나 쉽게 상벌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도 아이들의 이런 반응을 끌어내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휘두르는 상과 벌의 반대편에는, 대화와 소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한참 걸리는 그런 대화와 소통. 특히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앞에 두고 하는 대화는 아이들이 자칫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마음이 다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해 나가는 대화와 소통. 아이들이 이를 통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틀이 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학을 가지고 6년간 학급운영을 해 보았는데, 요즘들어 가지는 생각은 또 조금 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상과 벌 이전에 이야기나누고 이해시키고 이해당하는 방식을 가정과 학교에서 지켜왔는데, 요즘 그런 철학이 아이들을 능동적으로도, 수동적으로도 만들지 않고, 그냥 아무 행동도 없는 아이들로 만드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 학급에서, 저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시키지 않아 왔습니다. 다른 반에 무엇을 보낼 일이 있어도,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제가 직접 다니곤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는 일이 쉬는 시간에 놀아야 할 아이들의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실 정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일인일역을 정하여 아이들에게 별 의미없는 역할 부여까지 하는 것이, 교실에서 아이들이 누릴 시간의 자유로움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하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이렇게 지내오면서, 올해들어, 저희 집과 저희 교실에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부쩍이나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저희 큰 아이 둘은 자기 방청소도, 자기가 먹은 식사와 간식도 치울줄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제 내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믿고 놔두면 하게 될 때 알아서 할 것이니 그저 부모는 제 할 일을 잘 하고 있으면 된다, 와 아이들이 꼭 갖추어야 할 습관은 알려주고 지도해야 한다는 생각. 아마 제 교직 경력이 짧은 탓에, 다른 선배교사들께서는 이미 이런 지점에서 갈등하다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교실에서 실천하고 계신 것이겠지요. 그것이 교실에서 시행되는 상벌의 모습인가보다, 싶습니다.
변화는 아이들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생각과, 변화는 전수하여야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 사이에, 우리가 가정과 교실에서 수행하는 상과 벌의 양상이 다르게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상은, 예고되지 않은, 그러면서도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모습에 대해서 준비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올해의 상은, 학급 다이어리에 가장 많이 칭찬하는 너로 이름이 적힌 아동, 배움일지를 가장 성실하게 적어 제출한 아동, 마니또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친구들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아동 - 이건 그런데 상을 주진 못했네요... - 에게 마련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교사가 아동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 개인적인 격려와 칭찬의 편지나 면담 시간의 칭찬하는 말 같은 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매년 예고된 상이 하나 있습니다. 모둠일기를 가장 잘 쓴 모둠에 주어지는 일일 일사탕. 그런데, 이렇게 주어지는 상이 시간이 지나면 빛바래더군요. 더 큰 상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 일일 일사탕에 이멘토스 같은 - 아이들의 활동이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상은 일회적이고 (아이들이 보기에는) 즉흥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벌은, 그저 대화 이상을 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정에서 간혹 아이들에게 크게 노할 때가 있는데, 가끔은 화가 화를 부르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 행동에 대해서, 아이들과 함께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 마음가짐은, 하나의 문제 행동에 대해서 백 번 이야기 하였더라도, 백 한 번째의 문제 행동에 대해서, '너 또 왜 그러니!'라고 고함지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 백 번과 똑같이 아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왜 그랬니, 무엇이 어렵니, 어떤 문제가 있니'로 묻고 이야기나누는 방식으로 해 가려고 합니다.
저는 확실히, 변화의 모습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변화하기까지 기다리는 모습으로 아이의 곁에 대기하는 방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이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모습을 어떻게 추동할 것인가의 고민을 가지고 또 한 해를 준비해 볼까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