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선생님 #6. 대답 안 하는 아이
딸 아이가 말대꾸하는 건 참 꼴 보기 싫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열 받는 순간이 있다. 묵묵부답일 때다. 뭐가 기분이 나쁜지 눈동자를 45도 아래로 내리고 입을 꾹 닫으면 답답해서 미쳐 버린다. 속이 터져 죽기 일보 직전에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뭐라고 구시렁거린다.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교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짧은 시간에 답 듣고 끝내 보려는 내 욕심 때문일 때도 많다. 빨리 대답하지 않고 뭐하냐고 재촉하면 아이는 더 굳게 입을 닫게 되기도 한다.
올해, 우리 반에 ‘발표 공포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온 아이가 있다. 발표만 못 하는 게 아니라, 조금만 늦어도 교실에 못 들어온단다. 아니나 다를까, 첫 등교 개학 날도 애가 없어서 찾으러 다녔다. 교감 선생님께 SOS 해서 아이를 찾은 곳은 화장실. 방과 후에 엄마랑 통화해보니 자주 있는 일이고, 오늘은 특히 과제를 하나도 안 해서 선생님께 혼날까 봐 걱정하며 갔다는 것이다. 엄마와 통화하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야단치면 더 역효과 날 것 같아 첫날은 과제에 대해 아무 말 않고 보냈다. 그래서인지 방과 후에 엄마에게 밝은 목소리로 전화했다고 들었다.
두 번째 등교 전날. 그 아이가 메시지를 보냈다. 자주장 어떻게 하는지 몰라 많이 밀렸다는 내용이었다. 하는 데까지만 해서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죄송하다길래 “죄송한 거 알면 됐어~ㅋㅋ”라고 농담도 하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등굣날 아침. 자주장을 하나도 못 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괜찮으니 일단 오라고, 대신 남아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야단치려는 거 아니니 안심하고 당당하게 교실에 들어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방과 후에 자주장을 가져와 보라고 하니 안 가져왔단다. 안 가져온 게 아니라 안 한 게 분명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 이것저것 물어도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나: OO야. 미안하지만, 니가 몰라서 안 했다, 어려워서 못 했다 그런 거 전부 다 핑계인 것 같아.
OO: ….
나: 교실에 들어오는 게 힘들다고 했을 때, 니가 여태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아,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걸 많이 힘들어하는 아이구나.’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있었을 것 같아. 그런데 과제도 거의 하나도 안 하고, 전혀 성실한 모습을 안 보여줬기 때문에 교실에 못 들어오는 게 단순히 낯선 환경이 두려워서라는 생각이 안 들어.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피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 말 틀리니?
OO: ….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OO야. 너는 공격당하면 기분이 어때?
OO: ….
나: OO야. 누군가를 때리고, 누군가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만 공격이 아니야. 지금 니가 선생님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나도 안 하는 거, 니가 엄마한테 대답 안 하고 버티는 거 그런 걸 소극적인 공격이라고 하거든.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상대방 답답해 보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걸 소극적인 공격이라고 해.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 공격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좀 나쁘려고 하거든. 다시 물어볼게. 너는 공격당하면 기분이 어때?
OO: 나빠요.
나: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대답해주면 좋겠어. 아까 물어본 질문에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면 돼. 너 야단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기 싫어서 안 했어요, 귀찮아서 안 했어요 전부 다 할 수 있는 대답이야. 자, 물어볼게. 자주장이랑 과제 왜 하나도 안 했어?
OO: 귀찮아서요.
나: 그렇지. 귀찮지. 사실 그게 진짜 진심이지. 선생님이라도 귀찮을 것 같거든.
그렇게 겨우 대화를 이어갔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냐 물으니 또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앞으로 선생님이 어떤 주제를 줘도 네가 쓰고 싶은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 학교 오는 게 짜증난다, 엄마 잔소리 듣기 싫다, 선생님 과제 왜 내주냐 등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다 말이다.
한 마디 덧붙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조금 노력해 보라고 했다. 오늘 내가 하기 싫은 거 하나 꾹 참고하면, 성실함이 조금 성장하는 거고, 교실 문 열기 두려운 걸 이기고 한번 열면, 용기가 조금 성장하는 거라고 했다. 대학 다닐 때 지각했다가 앞문 열기 무서워서 그 길로 도망간 이야기도 해주었다.
아이는 중간중간 얼핏얼핏 웃었다. 아이를 보내면서 제발 화장실에 숨지 말라고, 찾아다니는 게 더 피곤하다고 농담했더니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아이들에게 자기 폰번호를 보내라고 했더니, 그 아이도 느낌표까지 찍어 번호를 보냈다.
아이가 달라졌는지, 달라질 수 있는지 아직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평소 나답지 않은 지혜로움을 어느 정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등굣날 아침, 안준철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 덕분이다. 선생님은 한창 예민한 여고생들과 함께했던 봄 수업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너 안에 네가 잘 있냐고, 너에게 안부 전해주라는 이야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 그 아이를 만나면 나도 꼭 너를 사랑하는 것을 너 자신에게 보여주라고 이야기해야겠다 다짐했던 것이다.
오늘 실시간 수업에서도 그 아이는 여전히 소리도, 화면도 꺼놓았다. 그동안 하지 않은 과제를 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 노력해 볼 생각이다. 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내 시간을 내어주겠노라고. 1년 뒤에는 오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안준철 선생님의 선물같은 글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