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선생님 #3. 아홉수
아홉수. 아홉,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따위와 같이 ‘아홉’이 든 나이를 가리킨다. 아홉수는 어떤 의미이든 인생의 전환점에 해당하는 시기이므로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리하기 쉬울 때이다. 그래서 어려운 일도 많이 생기고 사고도 자주 생기는 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특히 주의하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아홉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추측한단다(출처: 다음 백과사전). 내 나이 올해 서른아홉이다. 하필 올해 딸이고 학생이고 온통 6학년에 둘러싸이게 된 것은 그래도 우연일 것이다.
딸 아이 입이 댓 발 나왔다. 왕할머니께 버르장머리 없이 군 것 가지고 내가 한마디 한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야단치지도 않았다. 혹시 그런 행동을 했냐 물었고, 그 상황에 대해 몇 마디 나눈 것이 다였다. 모른 척할까 하다 결국 입을 대고야 말았다.
학기 초, 6학년이 된 우리 반 아이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은 모두를 공정하게 대한다는 것,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남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이다. 선생님이 여학생을 남학생보다 조심스럽게 대한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이해해 달라는 부탁이다. 사춘기 여학생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잔 같아 그렇다는 말도 덧붙인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차별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오랜 6학년 담임 경험상,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문제라 할지라도, 여학생 마음이 한번 돌아서면 그걸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누가 봐도 자기가 잘못한 일로 나무라도 그렇다. 이따금 정말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학생은 눈치껏 대해야 한다. 구박받고 10초도 안 돼 내 자리 옆에서 레슬링하고 노는 남학생과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사춘기라 눈 감아 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는 경우 특히 그렇다. 나도 욱하는 성격에, 말투가 다정다감하지도, 곱지도 않아서 자칫 아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 줄까 봐 늘 조마조마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의 담임으로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생길 때는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도 하게 된다. 선생님에게 혼나 속상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내 인내심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딸 아이를 야단치는 때도 이와 비슷하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사춘기, 자기도 모르게 표정과 행동으로 기분을 드러내는 아이를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지 정말 어렵다. 별것도 아닌 내 한 마디에 눈동자와 입꼬리는 각각 45도 아래로 내려가고, 입이 거실에서 베란다까지 가 닿을 정도로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뒷골이 당긴다.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판단이 서는 날엔 호되게 야단을 치고 만다. 그런데 그게 일관성 없어 보이는 것이 문제다.
4년 연속 6학년 담임을 하면서 매해 6학년 아이들과 생활해 왔다. 퇴근하면서는 다른 눈높이를 장착해야 했다. 집에 가면 있는 다른 어린이는 학교에서 만나는 어린이들과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올해 학교에 있는 어린이들과 집에 있는 어린이가 같은 학년이 되었다. 온종일 만나는 어린이를 다른 눈높이로 대할 필요가 없어 좋은 점이라곤 별로 없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눈치 보고 살아야 하지.’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다.
온라인 개학으로 아직 아이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만나는 것만으로 벌써 성향 파악이 가능한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 조금만 늦어도 교실에 못 들어가서 그날은 무단결석을 하고 만다는 아이. 그 아이가 며칠째 과제를 올리지 않는다. 모르겠으면 단톡에 물어보든지, 전화하든지, 엄마한테 부탁하든지 하면 될 것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니 점점 내 마음도 걱정에서 화로 바뀐다.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으니 더 그렇다.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는 그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 나도 모르게 다그치는 것부터 시작하면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기분이 달라지는 따님이 오늘은 다행히 웃으며 배웅해줬다. 현관문 열고 나가는데 뚱하고 있으면 내 기분도 바닥을 친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참아줄 수 없는 날엔 잔소리를 쏟아붓고 나온다. 현관문을 있는 힘껏 쾅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 날은 출근하는 내내 신경이 쓰인다. ‘좋게 이야기할걸, 그냥 참을걸, 그래도 너무 버르장머리 없잖아’ 오만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딸 아이가 어쩐 일로 손 뽀뽀까지 날리며 보내주었다. 당연히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매일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이 불쌍해서 못 살겠다.
직장이고 집이고 6학년 밖에 없는 나는 요즘 너무 괴롭다. 직장에서 아이들 눈치 보며 산 지가 몇 년인데, 올해는 아니 앞으로 몇 년은 집에 가도 눈칫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생겼다.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내 성격 탓에 더 죽을 맛이다. 그래도 별수 없다. 엄마니까 참다 참다 성질내기도 하고, 선생이니 눈치 보다 야단치기도 하며 살아야지 싶다. 어쨌든 질풍노도의 어린이들 때문에 피 말라 죽을지도 모르는 올해, 아홉수 미신에 휘말린 것 같은 이 느낌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