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리 #2.'어찌 살 것입니까'
작가는 책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편 가르지 않기를, 차별받지 않기를,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아기를 살리기 위해 성별, 신분, 나이를 떠나 마음을 합쳤던 푸실이와 효진, 선비처럼 모든 사람이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마음 모아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작가는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 이 이야기를 썼다. 너무나도 잘 썼다.
(사진 출처: 비룡소 홈페이지)
한 마디로 너무 가슴 아팠다. 아픈데 딱히 먹일 보양식이 없어서 일곱 살인데도 어머니 젖을 먹는 귀손이가 불쌍했다. 태어나자마자 아픈 오빠에게, 이어서 부잣집 도련님에게 젖을 빼앗긴 아기가 가여웠다. 아픈 아들 살리려고 빚을 내는 바람에 자기가 낳은 갓난쟁이는 버리고 유모로 팔려 가는 어머니 모습도 아팠다. 그런 어머니에게 푸실이가 굶주린 아기를 데리고 갔다 들켜서 대감마님에게 끌려가 매질 당한 아버지는 또 어떤가. 무엇보다, 딸이란 이유로 아버지 봉양에, 두 동생 양육에, 온 식구 생계까지 짊어진 푸실이가 이리저리 부딪치며 악착같이 살아내는 모습이 정말 눈물겨웠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거기서도 신분 차별, 남녀 차별이 존재한다. 고사홍 대감도 손녀 애신이가 유진 초이를 좋아한다 했을 때 불같이 화를 냈다. 비록 번듯한 미군이 되었지만, 출신이 천하기 때문이었다. 애신이 신분은 양반, 유진 초이는 어릴 적 노비였다. 하지만 내가 본 고사홍 대감은 아주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다. 시대 분위기상, 손녀를 노비 출신과 혼인시키겠다 하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신분이 아니라 됨됨이로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에 반해 담을 넘은 아이에 등장하는 대감마님은 모질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 손자가 중하다지만, 굶어 죽기 직전인 자기 자식에게 몰래 젖 좀 줬다고 유모 남편을 불러다 매질까지 한다. 혹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일부러 푸실이 어머니에게 건강한 아이만 잘 소화할 수 있는 젖이 나오도록 한약을 먹인다. 자기 손자만 지키겠다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유모가 친자식에게 젖을 나누어 주면 자기 손자가 배고플 때 젖을 배불리 먹을 수 없을 거라는 못된 심보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양반보다 담을 넘은 아이에 등장하는 양반이 훨씬 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작가가 찾은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기에 더욱 그랬다. 그 시절 양반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네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매질 당한 아버지는 푸실이를 크게 야단친다. 심지어 막내 아기를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먹는다. 하지만 푸실이는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아이가 아니다. 옳지 않은 어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막아선다. 산에서 주운 ‘여군자전’에서 문이 막히면 담을 넘으라는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이다. 푸실이는 대감마님 앞에서 당당히 자기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딸이란 이유로 이름조차 없는 막냇동생에게 예쁜 이름도 지어준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런 말도 하였다.
“지금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나누고, 어느 동네에 사는지로, 또 나이별로, 온갖 조건으로 편을 나누어 구분 짓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편이 아니면 배척하고 차별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중략) 신분과 성별로 구분 짓고 차별하던 옛날과 지금의 상황이 제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담을 넘은 아이 속 이야기를 그저 옛날 일이라 넘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작가가 푸실이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물은 질문에 대답해 보면 좋겠다.
‘어찌 살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