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손주 6. 노력은 해볼게, 살아보겠다고.
미자는 아팠다. 지난가을부터 이번 겨울까지 자꾸만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입퇴원을 반복했다. 의사는 말했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져서 자꾸 탈이 나시는 겁니다. 밥 챙겨 드셔야죠."
미자는 되물었다.
"별로 살고 싶지가 않은데요."
미자는 살고 싶지 않았다. 미자의 소원은 그저 오늘 밤이라도 잠든 채 이 세상 훌훌 떠나서 동네 사람들이 "지난밤에 저어 쪽 집 혼자 살던 여자 갔대." 정도의 애도를 받는 것, 그뿐이었다. 미자는 배고프면 두유 하나, 너무 배고프면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밥상을 치웠다. 미자는 기운을 잃고 부쩍 말라갔지만 미자가 미자를 걱정하지 않으니 이 세상 아무도 미자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동네 선생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언제 퇴원하실 거냐고, 우리 애들이 기다린다고 역성을 냈다. 작년 여름부터 미자의 일상에 불쑥 나타난 성가시기도,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미자는 그 선생과 아파서 내내 못 지킨 약속을 다시 잡았다.
"겨울방학이 끝나는 2월엔 꼭 만나요. 꼭이에요. 꼭!!!!"
미자는 4번의 입퇴원을 반복하고 1월 초 퇴원했다. 미자는 마을회관에 열심히 나가기로 했다. 동네 혼자 사는 여자라고 수군거리는 동네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이제 두유만 먹고 치우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마을회관에 가서 언니들이랑 얘기도 하고, 마을회관에서 차려주는 밥도 점심 저녁으로 열심히 얻어먹었다. 미자는 2월을 대비했다. '2월까진 또 쓰러지지 않을 거야.' 다짐했다.
한 달 동안 마을회관에서 열심히 밥을 챙겨 먹은 미자는 벚꽃망울처럼 뽀얗게 살이 올랐다. 미자는 잔소리쟁이 동네선생과 동네손주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2월 동네손주들을 데리고 뭘 또 바리바리 싸들고 동네선생이 놀러 왔다. 동네손주 주희는 저 멀리서부터 미자에게 달려와 포옥 안겼다. 동네손주들과 동네선생은 왜 자꾸 아팠냐고, 이제 안 아프기로 약속하자고 참새처럼 째악 째악 했다. 미자는 성화에 못 이겨 이제 안 아프겠다고 약속했다.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진 모르지만 노력은 해봐야 하는 약속이었다.
동네선생과 동네손주들은 오늘 카페라는 곳을 갈 거라고 했다. 미자는 수중에 돈이 넉넉지 않아 내키지가 않아 머뭇거렸는데 동네선생이 퇴원기념으로 자기가 쏘겠다고 했다. 미자는 두 손을 내저었지만 동네선생은 동네손주들이 기대하고 있으니 가야 한다고 했다.
차를 끌고 시골길을 달리니 2층짜리 파란 건물이 나왔다. 공주가 사는 별장 같기도 했다. 큰 유리창 가득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미자의 언 등을 녹였다. 미자는 대추차를, 동네선생은 핫초코를, 동네손주들은 에이드를 시켰다.
미자는 동네선생에게 아픈 동안 얼마나 서러웠는지 말했다. 말하다 보니 울컥 눈물도 나 잠깐 울었다. 동네선생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슬프기도 희망차기도 한 눈빛을 보냈다. 미자는 동네선생의 눈빛을 받으며 30년 전도 말하고, 10년 전도 말하고, 6개월 전도 말하고, 지난주도 말했다. 자꾸 들어주니 자꾸 토해내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그러고 나면 꼭 후련하기도 했다.
미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공주님 살던 집 같은 이곳을 둘러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두고 죽으려니 아쉽다."
동네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저랑 내년에도 놀러 다니셔야 하니까 밥 잘 챙겨 먹으세요. 이건 진짜 약속하세요."
"알았어요, 노력해 볼게요."
이 성가시기도,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동네선생이 다녀가는 동안만큼이라도 미자는 잘 먹어보기로, 살아가보기로 약속했다. 동네선생에게, 그리고 미자에게.
*초등학교 학생자치회 '동네손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미자'는 저희가 찾아뵙는 할머니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