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선생되다 11. 오락실로 헤쳐모엿!
너네 동네는 어땠어? 나 초등학교 다닐 땐, 우리 동네에 오락실이 하나 있었거든.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글쎄, 이름이 있었던가?
우리 동네 5,6학년이랑 중학생 중에 '나 좀 개구지다.'하는 애들은 거기 다 모였어. 철권도 하고, 비행기 게임도 하고 했었는데 나는 펌프랑 디제이게임에 미쳐있었지. 펌프에 나오는 노래는 거의 다 외웠고, 펌프로 베토벤 S 못 맞으면 그게 분해서 집에 못 가고 그랬다니까. 그 실력이 어디 안 갔는지 지금도 영화관 앞에 있는 오락실에서 터키행진곡 A 맞고 그래. 한 번 하면 5분은 주저 앉아있지만.
내 기억에 그 때 게임 한 판에 100원이었던 거 같애. 컵볶이가 300원이었으니까 한 판에 100원이면 가격이 꽤 쎘지. 실력이 안 좋아서 10초만에 게임 끝나면 피눈물나는 거고. 돈 없는 애들은 돈 있는 애 게임 하는 거 옆에서 구경이라도 하면 그거마저도 인생의 낙이었어. '한 판만 해보자. 한 판만.' 빌어서 한 판 양보해주는 친구 있으면 걘 그때부터 내 영혼의 반쪽 되는거고.
그 때 오락실에 모이는 중학교 오빠들이 좀 무섭긴 했는데, 또 쫌 말 섞고 친해지면 내가 좀 잘나가게 된 기분? 그런거도 있었지. 그래서 괜히 철권 반대편에서 대결 신청하고 오빠들 귀찮게 알량거렸어. 다행히 못된 애들은 없었고 다들 오락실 쫌 다니는 순둥이들이었어. 겨울에 눈오면 언덕길에서 썰매 밀어주고 그랬으니까. 다들 순수했지.
근데, 어쩔 수 없이 오락실에서 안 좋은 것들이 공유되긴하는 것 같애. 마치 선생 없는 학교같잖아. 애들은 바글바글한데 통제할 사람은 없는. 뭐 가끔 오락실 사장님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겨!"하시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뭐가 전수됬냐면, 그건 바로
"돈 없이 게임 무제한으로 할 수 있는 만능 열쇠!"
(요즘은 CCTV 다 있으니까 따라할 사람은... 없을거야?) 색색깔 현란하고 뻣뻣한 노끈같은 걸 엮어서 만든 빗자루있잖아. 그 빗자루 솔을 다 빼면 안에 솔을 묶어두었던 흰색 플라스틱 끈이 있어. 그걸 빼서 끝을 동전 모양으로 굽히면 만능열쇠가 완성되거든? 그걸 동전 투입구에 마치 동전인양 넣어서 왔다 갔다 하면 오락실 화면에 뜨는 코인이 100원, 200원 올라가. 열 판을 하고 싶으면 열 번 왔다 갔다하면 되는거지.
나는 '그런 게 있다' 소문만 듣고 해볼 생각은 안했는데, 남자애들이 하더라고. 또 그럴 때만 실천력이 훌륭해 아주. 걔네는 빗자루를 살 돈도 없어서 동네 돌아다니면서 대문 열린 집 마당에서 빗자루를 훔쳐다가 만들었어. 그리고 만능열쇠로 가끔 나한테 비행기 게임을 무한으로 시켜주기도 했어. 근데 그 땐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했던 것같애. 대신 '한 판에 100원은 너무 비싸다'는 생각과 '만능열쇠 신박하다'는 생각만 했어. 왜 내 도덕성이 오락실 게임기 앞에서 무너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 같이 하는 일이라 나쁜 일이라는 감각이 무뎌졌던걸까?
초등학교 때는 보는 남자 눈이 많아서인지 만능 열쇠 제작을 안했는데, 여중 가서는 한 번 했어. 학교 빗자루 하나 분해해서 만능 열쇠를 제작하고 후문에 있던 오락실에 가서 신나게 코인을 올렸지. 그러고 벅차는 마음으로 마음껏 게임을 하려는데 CCTV로 보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다가오셨고 나는 손이 발이 될 것처럼 싹싹 빌고 바로 쫓겨났어. 그 후로 만능 열쇠는 쳐다도 안 보게 됐고.
내가 안 좋은 걸 쓰긴 했지만, 난 사실 오락실에서의 좋은 추억이 훨씬 많아. 학교 끝나고 학습지 선생님 오시기 전까지 친구들이랑 모여서 수다 떨고 게임하며 스트레스 풀고, 겨울엔 난로도 있으니 거기 보다 모여있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어. 요즘은 오락실도 별로 안 보이던데, 나에게 오락실 같은 공간이 요즘 아이들에겐 피씨방 정도 되려나?(나 때도 피씨방 진짜 많긴 했지만. 바람의 나라, 메이플스토리 다들 알지?)
반 애들이 피씨방 간다고 하면 정색하는 시늉은 해. "가지마러~" 훈계인지 장난인지 모를 목소리로 맘에 별로 없는 잔소리도 하고. "우리 애가 요즘 피씨방을 가서 걱정이에요." 어머님이 말씀하시면 장단 맞추면서 걱정되는 표정도 지어드려.
근데 오락실, 피씨방이 꼭 나쁜 곳인가 싶어 난. 뭐든지 정도가 중요한 만큼 너무 과하게 미쳐버린 것만 아니면 그 나름의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 때는 게임에 미쳐도 어울릴 나이잖아. 30살 먹고 미치면 그게 더 거시기하지 않을까?
지금 나에게도, 그 때 그 오락실 같은 곳이 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컵볶이 한 손에 들고 쪼르르 모여들어서 수다 떨고 게임하며 스트레스 풀고, 서로의 펌프 실력을 겨누며 꺄르르 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아지트 같은 곳. 그런 곳이 지금의 나에게도 있으면 참 좋겠다.
아, 그립다. 그 때의 그 곳, 그 때의 그 아이들, 그리고 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말괄량이 선생되다 11. 엄마, 나 임고 안볼래. 입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마음을 녹이는 나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