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선생되다 4. 차별해주세요, 저는 공부잘하니깐요.
"선생님, 쉬운 문제만 내면 저희한테 도움이 되나요?"
철수는 물었다. 철수는 수학 잘 해서 어려운 시험 문제도 잘 풀 수 있는데, 기본 문제들로만 구성되어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핵심 개념을 익힌 상태라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나의 평가 방식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지금껏 5년간 나는 성적으로 서열을 나누는 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수학의 경우에는 특히 기본 문제를 중심으로 단원평가를 출제했다. 아이들이 핵심 성취 기준에 도달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어렵게 꼬고 계산 복잡하게 내서 틀리게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나의 교육철학이기 때문이다.
가끔 공부 잘하는 아이 입을 통해 "선생님, 저희 엄마가 학교는 쉬운 문제만 내니까 학교에서 잘 보는 건 잘 보는 것도 아니래요."라는 말을 전해듣거나, 학부모 상담을 온 어머니가 "선생님, 너무 쉬운 문제만 내시면..."하거나 했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핵심 성취기준에 모든 아이들을 도달시켜야 하는 초등교사이기에 단원평가에 어려운 문제를 섞어서 열심히 그 단원의 핵심 개념을 익힌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줄 필요는 없으며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꼬아놓은 문제를 맞춰보겠다고 문제집 더 풀 필요 없이 그 시간에 세상 공부를 하거나 친구랑 뛰어놀면 된다고.
그런데 우리 반 아이가 직접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서열이 나지 않는 내 평가 방식이 불만이라면서. 한 번도 아이로부터는 내 평가 방식에 대한 불만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네가 어따 대고 나한테.'라는 꼰대 마스터스러운 생각이 치밀기도 했다. 경쟁해야 하는데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선생님, 그게 불만인 학생. 근데 이거, 뭔가 낯설지가 않아. 젠장, 내가 또 그랬었구나.
+젠장
[젠ː장] [감탄사] 뜻에 맞지 않고 불만스러울 때 혼자 욕으로 하는 말.
출처. 네이버 사전
"백합반, 재수없쒀!!!!!!!!!!!!!!!!!!!!!!!!!!!!!!!!!!!!!!!!!!"
달애였다. 나랑 맨날 저녁시간에 서로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놀던 달애. 저녁시간이 끝날 때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랑 놀 수가 없어. 난 기숙사에 가야하거든.’ 그런 표정으로 책가방을 챙길 때면 옆에서 항상 울부짖었다. 백합반, 재수 없다고.
백합반은 고등학교 특별반이었다. 특별반에 뽑히는 기준은 단 하나. 공부를 잘 하느냐 못 하느냐.애가 싸가지가 있느냐 없느냐, 공부에 대한 의욕이 있느냐, 없느냐는 백합반 선별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백합반은 야간 자율학습도 따로 했고, 2학년부터는 학교 안에 새로 지어진 신축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특혜를 누렸다. 학교의 목적이 모든 아이들을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라는 기색을 세우려면 학교와 집이 얼마나 먼지를 기준으로 몇 명이라도 기숙사에 수용했다면 좋았을 텐데, 단호하게 공부를 잘하면 기숙사에 들어갔다. 때문에 길 건너면 자기네 아파트인 애도 기숙사에 살았고, 걸어서 20분인 나도 기숙사에 살았고, 봉고타고 40분인 달애는 통학을 했다. 쓰다보니까 진짜 재수 없잖아.
"백합반 재수없쒀!!!!!!!!!!!!!!!!!!!!!!!!!!!!!!!!!!!!!!!!!"
달애의 울부짖음을 듣는 내 마음은 어땠냐고? 좋았다. 재수 없는 집단에 속해있는 게 좋았다.가방 등에 메고, 공부할 책은 가슴 팍에 끌어안고 나는 이만큼 잘하는 아이라는 생각으로 기숙사를 향해가는 게 좋았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너는 못하니까. 나는 기숙사에 가고 너는 이 낡은 건물에 머무르는 게. 좋았다.
이건 내가 얻어낸 것이었다. 1학년 입학할 땐 나는 백합반에 들어갈 성적이 아니었다. 1학기에 좀 열심히 했고 워낙 두뇌가 좋은 것까지 합쳐져서 2학기 때는 백합반에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 되었다. 이건 순전히 내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어쩌면 너희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 노력으로만 된 건 아니거든. 나는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너네보다 2배 더 잘 보는 스타일이야.’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애가 싸가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백합반 선정 기준이 아니다.
차별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원에서 대우받고 학교에서 혜택을 누렸다. 친척들은 사촌과 나를 비교했고, 비교에서 나는 항상 우위였다. 나는 차별이 좋았다. ‘차별해주세요, 저는 공부잘하니깐요.’그리고 삶은 경쟁과 차별의 연속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항상 우위였기에 불만은 없었다, 만족이 있었지.
그런데 교사가 되어 내 교실에서만큼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이 손 잡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도달하는 그런 유토피아. 하브루타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또래교사제로 서로를 가르치고 핵심성취기준에 도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매일 남아 서로에게 문제를 내주며 함께 공부시켰다. 그리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성취기준에 도달했다. 그게 나의 능력이라고도 생각했다. 서열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럼, 불만이 생기기도 한다. 남을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는 아이들, 서열이 확실히 나는 시험이어야 나의 100점이 빛나는 아이들. 딱 나 같은 아이들.
얼마 전에, ‘나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된, 거기에 자기계발 논리가 더해져 이 모든 불평등은 노력하지 않은 너의 책임이라는 소름 돋는 비판이 팽배한 사회, 그리고 그 속의 이십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 채찍질은 스스로만을 향하지 않는다. 나는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기에 나의 성공 여부를 떠나 성공하지 못한 자는 노력하지 않은 자이고 덜 대우받아 마땅한 자이다. 성공하지 못한 자를 뭉개고 조리돌림하며 성공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의 불안을 다독이는 것이다. ‘계속 노력해야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면서. 가혹한데 현실이고, 우리 아이들이 마주해야 할 삶이기도 하다.
현 세대 이전의 교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 세대의 교사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직장임엔 틀림없다. 교사하면서 힘든 일, 서러운 일, 운 일도 많지만 20대 중에서 정년과 칼퇴가 보장된 정규직 교사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다. 그러니까 좀 애매해진다. 나는 애초에 초기 경쟁에서 승리하여 남은 40년을 정리해고의 두려움 없이 칼퇴하며 살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경쟁하지 말고 함께 하자고 하는 것에 얼마나 힘이 실릴 것인가. 나는 한 번도 차별과 경쟁에서 처절한 밑바닥을 경험해 보지 못했음에도 누군가에게 경쟁의 레이스에서 자유로워지자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게 나의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나는 그냥 내가 좋은 대로 가르치련다.나는 부진으로 시작한 아이가 100점 시험지를 흔들며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눈을 반짝이는 게 좋다. 학습지 빨리 푼 애가 못 푼 애 가르치면서 부쩍 친해지고, 성적 오르면 같이 기뻐하는 게 좋다. 우리 반은 놀기도 잘 노는데 공부도 잘하는 반이라고 자랑하는 아이들이 좋다. 난 그냥 그런 것들이 좋다.
서열 매기자고 하지마,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 다 도달하는 걸 목표로 가르칠거야. 시르면 시집가.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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