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손주 7.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은 수기처럼 씁니다, 흩날리는 봄꽃처럼 가볍게 향긋하게 읽어주세요]
할머니를 뵈러 가는 날입니다. 아이들과 운영비 25000원으로 뭘 사가면 좋을지 논의했습니다. 감기가 채 다 낫지 않은 할머니를 위해 아프실 땐 밥심이니 반찬과 감기에 좋은 과일을 사가기로 합니다.
단골이 된 기분이 드는 인심 좋은 반찬가게로 향합니다. 사장님을 보자마자 오늘은 서비스 안 받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사장님께서 왜 준다는 서비스를 안 받느냐고 기분 좋은 역성을 내십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꼭 정가로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된장국, 부드러운 밤콩볶음(사장님 추천), 어묵볶음(아이들 원픽)을 딱 사고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2000원짜리는 괜찮잖아!!" 하면서 계란말이를 넣어주셨습니다. 마음이 몽글몽글 훈훈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응원받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우렁차게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길을 나섭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트에 갔습니다. 블루베리를 3000원에, 오렌지는 5000원에 사겠다던 우리의 계획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손바닥만 한 용기에 담긴 블루베리는 8000원, 오렌지도 8000원... 과일 코너에서 고민고민하다 결국 6000원에 딸기 한 상자를 샀습니다. 제철과일이니까 맛있고 건강에도 좋을 거라며 서로 다독였습니다.
이제 할머니께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갑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저희가 드린 선물 덕분에 감기를 몰아내시고 텃밭에서 씨를 뿌리고 계셨습니다. 저희 반 공주들은 할머니께 아주 밝게 첫인사를 건넸습니다. 담임 마음이 엄청 뿌듯해지게 말이죠~?
할머니랑 방에 앉아서 지난번 선물과 이번 선물에 대해 서희가 한참을 브리핑했습니다. 할머니는 "예쁘다." "고맙다."처럼 이쁜 말들을 저희 반 공주들에게 마구 주셨습니다.
요즘 교과서에서 민주화 과정에 대해 배우고 있는 아이들은 옛날을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6.25 전쟁 때, 4살이었는데 가족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할머니와 둘이 남아 빛이라도 새어나갈까 모든 불을 끄고 배고프면 보리밥 한 줌 입에 넣으며 버틴 기억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품에 안겨있다가 피난길에서 돌아온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니고 아버지가 가방을 통째로 태워서 그날 후로는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과,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의 역사 모두를 만나는 것이라는 걸 또 한 번 느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한참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생생한 역사가 아이들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아이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매일매일이 좋은 시절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에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은 꽤 긍정적인 일이겠지요. 매일매일 주어지는 우리만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며 아이들과 뜻깊은 시간들로 채워나가야겠다는 욕심도 들었습니다.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할머니가 울컥 눈물을 쏟아내셨습니다.
"나는 딸도, 며느리도 없는데 이렇게..."
할머니는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우셨습니다. 저는 조막만한 할머니의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온 응원을 담은 포옹이나 쓰다듬기, 그런 것만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아이들은 할머니와의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도요. 아마 할머니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