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사색#1 판사들의 이야기인데.. 교직이 자꾸 떠오르네.. '판사유감'
개인주의자 선언을 재미있게 읽고, 뒤늦게 더 이전에 쓰여졌던 문유석 판사의 '판사유감'이란 책을 읽게 됐다.
판사의 업무과정이나 조직내에서의 다양한 일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읽어가다보니, 교육 현장과도 맞닿는 부분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늘공(늘~~ 공무원 신분)으로서의 입장, 교사가 되면 보통 연차에 상관 없이 직급상으로는 같다보니 나이나 경력으로 나뉘어지는 상하관계(요즘엔 줄어가는 분위기지만..), 효율적이지 못한 평가 체계로 인해 나타나게 되는 괴로움 등등.. 판사의 이야기지만, 읽으면서 교직에서의 다양한 모습들을 떠올리게 됐다.
지난 날의 난 너무 그런 부조리함, 모순 등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넘겨왔다는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변화시켜 가면 좋을지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도 없이..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도 그랬었다. 그냥 받아들이고, 최소한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정도에서는 후배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도에서 멈췄었다. 요새 유행하는 '라떼는 말야~'는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
이밖에도, 판사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글들을 읽으며 조직안에서의 교사가 아닌 학급에서 학생들을 마주하는 교사로서의 내 모습과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도 되돌아볼만한 글들이 많았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배움을 일으키고,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을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입장에 어떻게 공감하고 좀 더 다가설 수 있을지 등..
판사의 에세이를 통해 교육의 다양한 모습과 교사로서의 나를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50쪽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사람에게는 무덤 대신 두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51쪽 법원에서는 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감옥에 보내거나, 누구보고 누구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거나, 남의 집을 팔아 빚을 받아주거나 하는 일을 합니다. 모두 사회를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개인판산, 개인회생사건 한 건 한 건은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한 아이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100쪽. 자본주의의 압축 성장기와 그 모순의 격화로 인한 기존 권위 부정의 혁명기를 거치면서 2000년대의 한국은 물신숭배 외에는 남지 않은 아노미 상태인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책으로부터 '돈'이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이 훌륭하다'는 식의 교훈을 들으며 컸지만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면 바로 '웃기시네'라는 냉소만이 돌아오죠.
112쪽 뭘 해도 감동도 설렘도 없는 삶이란 겉만 번지르르한 지옥이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도 법정이 주는 배움의 하나입니다. 법정 스님 도움이 필요 없지요.
128쪽 흠흠이라 함은 무엇인가?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은 본디 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인 것이다.
137쪽 사람들은 관심 없는 타인들에게 세련된 친절을 베풀 수는 있어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 내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친절할 순 있지만, 같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한..
138쪽 미국의 문제해결법원.. 법원이 중립적인 판단자 역할만 수행하던 전통적인 역할을 넘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 위해 치료, 상담 프로그램의 제공과 지속적인 사후 감독 등 적극적, 후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특수한 법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법부도 가정법원을 중심으로 가사, 소년 재판의 영역에서 문제해결법원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정법원에는 판사보다 상담위원들이 많을 정도지요. -인성교육에서 학교의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너무 학생들의 성장 그중에서도 지식과 역량에만 치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학급생활내에서 지도하곤 있지만, 학교를 벗어난 곳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150쪽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상 결론을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168쪽 한국에서는 개념, 연혁, 요건 기타 등 준비운동만 심하게 하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실제 수영장에는 뛰어들지도 않고 돌아오곤 했었는데, 여기서는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가 준비운동 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회계부정 스캔들로 불리는 엔론 사건의 사례를 분석했다가, 이번 주에는 회기에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률 개정안과 각 이익집단의 로비 내용을 소재로 특정 제도 배후에 있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토론했다가 하니 이건 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바로 물에 처넣고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헤엄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지요.
170쪽 이런 풍토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모든 질문을 존중하는 교육 방식인 것 같습니다. (중략) - 중략된 내용들이 우리 교육에 대해 생각할 거리는 많이 던져줌
172쪽 다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일에 대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자기 일을 소중히 여기기에 남의 일도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한한 그 사람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해줍니다. - 중략 - 그런 문화가 어느 일을 하든지 자기 일과 자기 권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182쪽 오늘 많은 토론을 했는데 사실 난 이렇게 생각해.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하는거야.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거든.
192쪽 적극적으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 참여자들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조성해줘야 합니다. 적절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이 좋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농담. 다음으로는 적절한 질문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절히 유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관심 갖고 있는 화제를 살짝 제기하면서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물론 그러려면 평소 대화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야겠지요.
204쪽 예절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마음이지 형식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의 변화는 조금이라도 손위사람들이 먼저 문을 여는 것이 평화로울 것이고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가 손위라는 의식조차 없이, 문 옆쪽에 선 사람이 문을 열고, 두 손이 말짱하니 알아서 자기 숟가락 젓가락 가져오고, 제사상에 놓인 영정 사진도 아닌데 회식 참석자 전원이 무릎 꿇고 잔 올리는 걸 당연히 여기지 말고, 어차피 일도 많고 바쁜 와중에 용건이 있으면 옷 갖춰 입고 찾아올 필요 없이 전화로 이야기하고, 늘 먼저 환하게 인사하고 말 걸고.
210쪽 결론적으로 부장님들께 드리는 제 처방은 '눈높이를 낮추시라!'입니다. 가끔 돌연변이로 판결을 성숙하게 잘 쓰는 분도 있겠지만 그쪽이 비정상이고, 아직 미숙한 쪽이 정상입니다. 물론 미숙하지만 성장 가능서은 무궁무진한 분들이고요. 이전보다 혹독한 경쟁을 이겨내고 입사한 분들인테 포텐셜이 없을 리 있겠습니끼?
219쪽 미국식 글쓰기는 철저히 두괄식이지요. 이슈와 자기 결론을 먼저 분명히 제시하고, 그 근거를 상세히 설명하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결론을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사람들의 글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오해하지 않을 수 있다.
237쪽 유머는 한발 물러서서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인 태도 위에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봅니다. 유머는 권위주의의 벽을 무너뜨리는 힘도 있습니다.
248쪽 제도 이전에 욕망이 있다.
267쪽 프로페셔널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잘해야'합니다. 우리는 노력은 했으되, 아직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282쪽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생들에게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주도록 부탁하자 상당수 학생이 기꺼이 도와주고 자신의 경험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행위에 대해 소액의 보상을 지급한 경우, 상당수 학생이 보상이 너무 적다는 것에 대해 불만족을 표시합니다. 전자는 뇌가 '자발적인 이타심의 발로'로 인식하고, 후자는 '대가 있는 서비스 제공'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죠. 일의 양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 중ㅇ하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예입니다.
기업이 직장을 놀이터처럼 꾸미고 구성원들이 각자 알아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해보도록 권장하며 '일과 놀이'의 구분을 없애는 것은 사실 인간 심리를 고도로 이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뽑아내기 위한 경영전략입니다. 상사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분위기를 끊임없이 조성하는 거죠. -교육에서는 어떻게 이런 SOLE를 갖추게 할 수 있을까?
310쪽 도대체 이 나라 공직자들이 얼마나 냉정하고 시민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냉혈한으로 보여왔기에 그렇게 반응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국민들이 고마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서 내는 세금으로 월급 받고 편안하게 사는 저 같은 자들은, 원래 직업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라고 월급 받고 사는 겁니다. -냉정한 교사로서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학부모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312쪽 이기적인 개인들에게도 이왕이면 남을 돕고 싶고, 가능한 범위에서는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본능도 있습니다. 비록 큰 희생까지는 감수하지 않으려 하고, 한결같지도 않고, 또 결국 그 자체가 또다른 자기만족이라 하더라도 이 작고 미약한 이타심, 다시 말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선의에 대한 신뢰가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