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교사라는 존재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교사라는 존재를 배웁니다.
너무나도 묵직한 말입니다.
지난 겨울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받았습니다. 1정연수 마지막 강의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님의 강의였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강의라기보다 교사에 대한 간절한 호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면 당신처럼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을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하고 당신의 삶을 그대로 베껴서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닌데.. 나처럼 똑같이 살면 안 되는데..'
가슴에 비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많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해? 왜 그런것까지 생각하면서 교사를 해야 해?'
하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이미 제 생각에 균열을 냈고, 중심을 흔들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나의 눈빛과 태도, 말투와 표정, 행동 습관, 문제 상황에 대한 반응과 대처 등 '나'라는 존재 자체를 배워갑니다. '성실하자.' 라는 말에서 성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성실을 내면화합니다. '존중하자.'는 말에서 존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꾸준히 지켜보면서 존중을 알아갑니다.
흔히 교사는 아이들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다음으로 아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사의 자리는 결코 쉽거나 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묵직하고 어려운 자리입니다.
지난주에 아이들과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2학년 아이들은 다툼이 잦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주로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해결할 기술을 배우거나 익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분을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방법을 함께 연습해보기로 했습니다. 통합교과인 봄 교과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서 연계해서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뭘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제 자신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나 전달법을 가르쳐놓고, 아이들에게는 너 전달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키자고 말만 했지, 먼저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부터 말하는 방법을 바꾸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와, 선생님도 기분 말하기 하시네요?"
"선생님도 그 말 했으니까 꽃잎 붙여야겠어요."
(아이들이 기분 말하기를 할 때마다 벚꽃잎 포스트잇을 붙여 공동의 목표를 이루도록 격려했거든요.)
이렇게 한 주를 보내고 나니 아이들 다툼이 있었을 때, "기분 말하기 해보세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어색하지만 시도해보는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습관이라는 게 단 몇 일만에 생기고 변화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갈 생각을 하니 희망이 보입니다.
아이들은 내가 먼저 약속한 말을 할 때,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먼저 책을 좋아하고 읽는 모습을 보일 때, 관심 없던 아이들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먼저 매일 글쓰기를 할 때, '글쓰기가 좋은 거구나.'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아이들처럼 글똥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영근 선생님께서 하시는 글똥누기를 보고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글똥누기를 내면서, 제가 쓴 글똥누기를 펼쳐봅니다.
물론 교사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행동으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교사도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니까요.
먼저 교사 자신의 장점을 찾고, 그 장점을 꾸준히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장점은 어떤 행동일 수도 있고 성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아이들은 선생님의 '그 좋은 점'을 서서히 닮아갈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