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첫 근무지가 폐교되었다.
2006년, 첫 발령 학교는 전라남도 영광군 가장 끝에 있었습니다.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딱 1개 노선이 있는데, 저녁 6~7시가 막차인 곳. 매년 복식학급이 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통폐합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던 학교였죠.
중앙정부의 기조 신자유주의 때문이었는지, 전남교육청의 의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학교를 통폐합해서 없애려던 시기라서 학교는 항상 열악했습니다. 지원을 많이 해줘서 학교가 살아나면 안 되니까요.
부로끄라고 하지요? 커다란 시멘트 벽돌 말입니다. 부로끄로 지은 다 쓰러져가는 관사가 있었습니다. 천장으로는 쥐가 다니고, 벽지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는 폐가 같은 곳이었죠. 저는 관사에 살 수밖에 없었어요.
일단 인근에는 전혀, 자취 또는 하숙을 할 곳이 없습니다. 읍내로 집을 구하러 가겠다니까 당시 교장선생님이 굉장히 화를 냈어요. 젊은 사람이 학교를 지켜야지... 하면서 혼내더군요. 정식으로 발령받아 출근도 하기 전에 교장한테 혼났는데 어쩌겠어요. 그냥 살기로 했죠.
내 돈을 주고 도배하고 장판을 깔았지만, 폐가 같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전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 단칸방에서도 살아봤고, 대학 때 하숙하던 집도 매우 낡고 허름했는데 말입니다. 20살 때부터 이미 한참을 나와서 살았는데... 저희 어머니는 이 집을 보시고는 울며 올라가셨어요.
여름이 되자 다시 곰팡이 올라오고, 이불 속에서는 지네가, 벽에는 쥐며느리가 바글바글 나왔습니다. 1년 내내, 방 안에서 모기장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이후,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교직원들이 바뀌면서 비어있던 다른 관사에도 선생님들이 들어오셨습니다. (모두 정년 퇴임 직전인 분들) 매주 수요일 학교에서 배구를 하고 회식 술자리가 있었고, 또 주 매주 월요일 관사 회식이 따로 있어서 제 차에 관사 선생님들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아주 재미있었겠죠?
맑고 순수한 시골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이런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며 행복하게 여겼어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는 떠났습니다.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께서도 먼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전남에서 타 교대 출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교장선생님께서도 광주교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본인이 너무나 힘들었던 경험들이 많았다고. 아마도 승진에 관련된 말씀이셨겠죠.
(전남지역을 폄훼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것은 다들 아시지요?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 교대 출신이 여러모로 유리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썰을 풀자면 별의별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미 너무 길어졌군요.
하여간 임용 지역 선택은 평생 살아갈 터전이 바뀌는 인생의 갈림길입니다. 한번 들어서면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직 교사가 재시험을 통해 광역시, 수도권으로 이탈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난을 하던데... 현직에 있으면서,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근무하면서 재시험을 본다는게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지는 생각해봤는지? 네가 한번 해볼래? 지방에 가라, 말아라?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