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3탄] 11. 무섭게 말하지 말고 단호하게 말하라
얼마 전, 친분이 있는 한 식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 집에는 우리 딸과 동갑인 딸이 하나 있다. 자기주장이 강해진 아이는 열심히 주장을 펼쳤다.
“OO아, 그거 지저분하니까 내려놓자.”
“싫어.”
“주스 병 위험해. 쏟을 수 있으니까 아빠가 할게.”
“싫어, 내가 할래.”
“어허.”
“아냐 아냐, 내가 할래, 할래!”
“어휴 정말, 알았어.”
그리고는 한 마디 더했다.
“쟤가 너무 잘해주니까 버릇없어지는 것 같아. 요즘 무서운 사람이 없어.”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공감할 장면이다. 그런데 교실도 다르지 않다.
“한 번 제대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요즘 뜨거운 맛을 안 봤지?”
“좋은 말로 할 때 적당히 해라.”
우리는 어쩌면 무서움을 감춰둔 채 친절하게 말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쉽게 부셔질 스티로폼 벽 너머에 숨겨 둔 맹수처럼 말이다.
1. 무서움 VS 단호함
PDC(학급긍정훈육법)를 나누러 종종 다닌다. 그러다 보면 선생님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친절할 때 친절하게 하고 무서울 때는 무서워야 한다는 거랑 다른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무서움과 단호함은 다르다’는 것이다.
단호함은 영어로는 Firm이다. 견고하고 단단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호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유지’라고 할 수 있다. 정해진 것, 결정된 것을 외부 요인이나 환경 때문에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호함은 내적인 것에 대한 묘사다. 외부와 내부로 구분해서 본다면 내부 자체가 주인공이다. 외부 요인 보다는 내부에 집중하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담보한다.
이에 반해 무서움은 영어로 Scary다. 두려움, 겁, 공포를 의미한다. 무서움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그래서 무서움을 한 마디로 말하면 ‘회피’라고 할 수 있다. 무서움을 주는 대상을 회피해서 이어질 고통이나 아픔을 없애는 것, 그것이 무서움의 목적이다. 그래서 무서움은 내부 보다는 외부가 주인공이 된다. 내부의 상태에 집중하기 보다는 외부에 있는 무서움의 대상에 집중한다. 그래서 일관성도 떨어지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중심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숙제를 안 하면 남아서 하고 간다는 학급 약속이 있다고 가정해보자.(물론 그걸 만드는 과정에는 학생들의 참여가 보장되었다.)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이 생겼다. 그런데 그 학생이 간절하게 말한다.
“선생님, 오늘 딱 한 번만 가면 안 될까요? 내일까지 꼭 해올게요.”
이 때 단호한 모습은 약속이 어떤 경우라도 지켜지도록 하는 것이다.
“안타깝네. 이 상황에서 우리의 약속이 뭔지 알지?”
“네.”
“그럼 하고 가렴.”
학생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을 물어도 어떤 상황이라도 약속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단호함이다.
반면 무서움은 힘을 사용한다.
“좋은 말로 할 때 하고 가라.”
“한 번만요~ 제발이요~”
이 때 어떤 상황에서는 너그럽게 봐준다. 하지만 어떨 때는 불같이 화를 낸다.
“약속을 누가 정했어? 니가 정했잖아! 그런데 니가 약속을 안 지키면 누가 니 말을 들어줘! 니 마음대로 할거야?!”
교사의 험악한 얼굴, 큰 목소리, 신랄한 비판에 학생은 움츠려든다. 그리고는 앞으로 교사의 기색을 살피게 된다.
학생은 둘 중 어떤 교실에서 안전함을 느낄까? 누군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곳에서는 안전함을 느끼기 어렵다. 그건 힘의 불균형과 수직적 관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2. 단호하게 말하는 방법
그런데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화를 내거나 겁을 주는 데는 익숙하다. 혹은 친절하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단호함은 낯설다. 그래서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아볼까 한다.
1) 단호한 분위기가 먼저
우리는 대화를 할 때 7% 정도만 말로부터 정보를 얻는다. 나머지는 비언어적 표현이나 반언어적 표현에서 메시지를 전달 받는다는 게 메라비언의 법칙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같은 말이라도 표정, 목소리, 빠르기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친절함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단호한 이야기를 웃으며 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렇다. 하지만 많이 활용해보니 현실은 달랐다. 웃거나 밝은 분위기로 단호한 이야기를 하면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말은 저렇게 하셔도 목소리를 들으니 안 해도 되겠구나.’
‘표정을 보니 그냥 한 번 말하고 넘어가시려나 보다.’
말과 비/반언어적 표현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이렇게 언어적 요소와 비/반언어적 요소가 불일치하면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호한 말을 할 때는 단호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더 큰 오해가 발생한다. 앞에서 이야기 했 듯 ‘단호함=무서움’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단호한 분위기는 무섭게 하는 게 아니다. 인상을 쓰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레이저를 쏠 듯이 째려보면 안 된다. 그건 이미 분위기로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호한 분위기는 담담함을 가지는 것이다. 흥분하지 않고 가볍지도 않은, 희곡으로 따지자면 해설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 담담함을 유지하고 반복하는 게 단호한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또박또박 씹어 말해서 강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 예외를 두지 않는 말하기
학생들은 교사의 단호함을 흔들고 싶어 한다. 집요하게 빈틈을 찾고 파고 들려 시도한다. 그런 학생들의 시도에 대한 교사의 반응이 학생들이 단호함을 인정하는 척도가 된다. 어떻게 대응하는 지가 학급의 단호함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말했 듯 단호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것은 예외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인정에 호소하고 조를 것이다. 특히 많이 쓰는 방법은 ‘가정법’이다. ‘선생님, 만약에 ~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한 상황이 발생해도 안 돼요?’ 등. 가정법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선생님, 만약에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건 그런 일이 생기면 생각해볼까? 미리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우리의 약속은 ~~이니까.”
왜냐하면 가정 하나 하나에 대응하기 시작하면 교사는 끝없이 가정법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교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오게 되고 단호함은 힘을 잃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대응할 필요가 없다.
그럼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일어난 다음에’ 말이다. 예외는 대다수가 잘 지켜져야 예외다. 변화구는 빠른 직구가 없으면 그냥 느린공에 불과하다.
3) 단호한 표현들
가정법이나 논리 싸움을 피한 뒤 단호함을 나타내는 표현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제한된 선택
“지금 할래, 아니면 나중에 할래?”
- 한계 설정하기
“~~는 선택 사항이 아니란다.”
“1분 더 기다릴게. 그 뒤에도 대답이 없으면 OO하는 것으로 이해하마.”
- 할 수 있는 것 말하기
“너는 ~~하거나 OO 할 수 있어. 어떤 걸 하고 싶니? 네가 선택해.”
- 질문하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기로 약속 했는지 기억나니?”
- 침묵하기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제스쳐나 행동으로 안내하기)
- 감정 전달하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니까 선생님은 지친다.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을게.”
4) 말이 아닌 행동으로
T.E.T의 창시자 토마스 고든 박사는 말했다.
“학생은 교사의 말이 아닌 행동에서 배운다.”
행동은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교사들은 흔히 학생을 움직이기 위해 위협을 한다. 그런데 그 위협이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다. 위협이 강할수록 학생들은 겁을 먹고, 그럼 행동을 바꿀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너 신청서 안내면 수학여행 안 데려간다!”
“원서를 제 때 안 내? 넌 중학교 못 갈 줄 알아!”
“내일도 일기 안 써오면 백 번 쓸 줄 알아.”
교사의 절박함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 위협이 얼마나 비효과적인지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위협은 고의든 아니든 시험에 들게 되어 있다. 만약 진짜 안 지키면 수학여행을 안 데려가고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을 것인가? 그 다음에 교사는 대부분 위협의 내용과 별개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모습은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의 단호함을 의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말을 했으면 지키고 행동해야 한다. 지킬 수 없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간단한 원칙이 단호함을 만든다.
포커에는 블러핑이라는 기술이 있다. 쉽게 말하면 ‘뻥카’인데 낮을 패를 쥐고도 패가 강한 척 돈을 많이 걸어 상대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는 기술이다. 블러핑을 잘하는 선수들은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그 판을 이겨도 본인의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와, 사실 나 블러핑이었는데 속았지?!’라며 자랑하는 사람은 하수다. 고수는 본인의 패를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블러핑은 상대가 ‘블러핑을 쓰는 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힘을 잃기 때문이다. 북한이 괌을 향해 핵미사일을 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트럼프의 행보에는 더 힘이 실렸다.
결론은 간단하다. 지킬 수 있는 것을 말하라. 말했다면 예외를 두지 말고 행동에 옮겨라. 그 과정에서 흔들리지 마라. 소리 지르지 않아도,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아도 학생들은 단호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3. 결국 단호함도 선택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결국 단호함도 선택이다. 우리는 왜 단호하기 어려울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정 욕구’다. 모든 학생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좋은 교사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우리를 단호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마음은 나쁘지 않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인정 욕구와 단호함이 충돌할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미움 받을 용기]는 이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다. 누군가에게(그것이 사랑하는 학생들일지라도)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얄밉게 굴거나 힘으로 눌러 미움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신념과 약속은 중간에 미움을 받더라도 관철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에는 불평하고 원망할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교사의 단호함이 학생들에게 더 안정을 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낳게 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 또한 그 학생들의 선택일테니.
내가 좋아하는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힘겨루기를 걸어온 학생이 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셨다.
“선생님, 그렇게 하면 애들이 선생님 싫어해요.”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괜찮아, 너희가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그건 너희 선택이니까. 사랑하는 건 선생님이 할게.”
단호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