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3탄] 4. '잘했어'는 잘한 게 아니다
앞의 글에서 교사가 학생의 과제에 개입하면서 생기는 문제점, 그리고 취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나누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학생이 자신의 과제를 잘 다룬 상황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때도 교사 본인의 과제가 아니니 개입하지 말아야 할까?
한 때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책이 있다. 캔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을 좋은 관계의 만능열쇠로 격상시킨 책이었다. 과연 그럴까? 만일 누군가 당신에게
“선생님, 아까부터 봤는데요, 팔다리도 기시고 굉장히 유연해 보이세요. 몸의 근력과 리듬감도 느껴져서 춤을 굉장히 잘 추시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당신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출 것인가?
아마 이 글을 읽다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하나는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칭찬에 한계가 있는 것이든지.
<<칭찬의 한계>>
1. 칭찬은 자발적 행동을 만들지 못한다.
어느 마을에 한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성격이 예민한데 매일 동네 꼬마 녀석들이 집 뒤뜰에서 공을 차느라 시끄럽게 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혼을 내도 잠깐이고 좇아내면 다시 돌아오고. 너무 힘들었던 할아버지는 한 가지 꾀를 내게 된다.
그날도 꼬마 녀석들이 시끄럽게 공을 차고 있었다. 그걸 본 할아버지가 다가가자 꼬마 녀석들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려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면서 10달러씩을 주는 거 아니겠는가? 꼬마들이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 10달러로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힘내서 차렴.”
꼬마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나게 10달러를 쓰고 공을 찼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매일 할아버지는 나와서 공을 차는 꼬마들에게 10달러 씩 주었다. 공을 차면 돈까지 준다는 소문에 아이들이 더 몰려 들었다. 그렇게 약 한 달이 지났다. 그날도 꼬마들이 공을 차며 할아버지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오늘은 3달러 밖에 못 주겠구나.”
꼬마들은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3달러만 받자 절반 가까운 녀석들이 공을 차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할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얘들아, 이제부터는 돈을 줄 수 없게 되었단다. 그래도 공을 열심히 찰 거지?”
그 말을 듣자 꼬마들은 화를 내며 말했다.
“에잇, 돈도 안 주는데 뭐 하러 공을 차러 여기를 와요!”
그리고 그 뒤로 시끄럽게 집 뒤에서 공을 차는 꼬마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공을 차는 즐거움 자체에 집중했다. 그런데 점차 돈에 더 큰 의미를 두기 시작하고 결국 본말이 바뀌어 돈 때문에 공을 차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돈이 사라지자 공을 차는 행동의 의미를 잃고 자발적으로 공을 차지 않게 되었다. 칭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칭찬이 순수하게 기쁘지만 점차 칭찬 자체가 목적이 되어간다.
2. 학년이 올라갈수록 먹히지 않는다.
상쾌한 마음으로 출근한 어느 날, 교감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말씀하신다.
“아휴, 김선생은 어쩜 그렇게 액셀을 잘 다뤄? 우리 학교에서 액셀은 김선생이 최고인 것 같아.”
이런 칭찬을 들었을 때 순수하게 기분이 좋은 선생님이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 같다.
‘또 뭘 시키시려고 저러시는 거지?’
자아가 형성될수록 비판적 사고에 익숙해지고 칭찬 속에 담긴 의도를 찾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칭찬을 한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칭찬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칭찬이 학생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만족감을 줘야하는데 고학년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6학년 학생들에게 칭찬을 하거나 보상을 제시하며 힘든 일을 시키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이유다.
3. 대가를 바라는 학생을 만든다.
세 번째는 칭찬이나 보상을 요구하는 학생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6학년 전담을 할 때였다. 수업 시간에 한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가 친구들을 조용히 시키기 시작했다.
“야, 조용히 해. 수업에 집중해야지!”
나는 약간 불편했지만 우선은 그냥 넘어갔다. 그 뒤 몇 번이 반복되었고 내가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려는 찰나에 녀석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제가 애들 조용히 시켰는데 왜 저 칭찬 안 하세요?”
“응? 그게 칭찬을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러자 곧바로 표정이 바뀌더니 이렇게 말했다.
“와, 선생님 진짜 치사하시네요.”
황당했다. 그 학생에게는 본인이 어떤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반응은 그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고. 칭찬을 많이 받은 학생들은 칭찬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커진다. 마치 선생님을 돕고 나서 보상을 받은 경험이 많은 학생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면
“선생님, 그거 하면 뭐 사주실건데요?”
라는 말을 먼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칭찬의 본질은>>
여기쯤 글을 읽다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칭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갈수록 다른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보상이다. 칭찬의 본질이 보상과 맞닿아 있다.
1. 칭찬은 결국 긍정적 평가의 도구다.
칭찬은 주로 수직적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교장 선생님께
“이야, 교장 선생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센스가 넘치세요? 지난번 회식 때 1차까지만 참석한 거 참 잘하셨어요.”
라고 말하는 평교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분명 칭찬하는 내용인데 왜 그럴까? ‘교장 – 평교사’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거꾸로는 칭찬이 어렵기 때문이다. 칭찬은 본질적으로 긍정적 ‘평가’이다. 요즘 교육 현장에서는 상호평가, 학생평가 등 관계를 넘어선 다양한 평가 방법들이 인정받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평가란 힘이 더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힘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 이 과정이 도구로써 작동할 때 한계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리하자면 칭찬은 긍정적인 평가이고, 그 평가에 활용되는 언어적 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행동주의가 드러내는 한계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 효과가 있던데?
이쯤 되면 다시 한 번 의구심이 생긴다.
‘그동안 칭찬으로 행동이 바르게 변한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칭찬을 하면 좋아하잖아?’
맞는 이야기이다. 칭찬은 듣는 학생의 동기를 자극하기도 하고 긍정적 관계 형성에 일조하기도 한다. 이 즈음에서 한 연구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심리학자들이 행동주의에서 강조하는 보상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연구를 해보기로 했다. 우선 철저한 실험 계획을 세웠다. 먼저 학생의 자연 상태(예 : 친구와 협력하는 학습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음)를 꼼꼼하게 관찰한 뒤 그 학생과 일대일 계약(예 : 우리 이 문제를 한 번 해결해보지 않을래? 앞으로 일주일에 협력적 학습활동에 두 번 참여해보자.)을 맺었다. 그리고 매일 행동을 관찰한 뒤 계약을 지킬 때마다 보상(언어적, 물질적)을 즉각적으로 실시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지속한 결과 학생의 자존감이 올라가고 관계가 좋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있었다. 후에 면밀히 실험 결과를 검토한 결과 실험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이유는 보상이나 행동주의적 기법 때문이 아니었다. 실험을 즉시에 해내기 위해 교사는 끊임없이 그 학생을 일대일로 관찰하고, 반응하고, 대화해야 했고, 그 관심이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내재적 동기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칭찬이 무용지물이라든지, 하지 말아야 할 비교육적 방법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계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칭찬만’ 활용하기 쉬운 학교 환경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3. ‘잘했어’와 ‘착하다’
학교에서 학생이 무언가 교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행동을 했을 때 교사가 하는 가장 흔한 말이 뭔지 생각해보았다. 아마 저학년은 ‘착하다’일 듯하고 고학년은 ‘잘했어’일 것 같다. 왜 이 말들을 자주 사용할까? 어떤 저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적인 칭찬들은 듣는 학생에게는 이렇게 들릴 가능성이 크다.
“(선생님의 말을 어기지 않고 그대로 하다니) 착하다. (다음에도 이렇게 해야 칭찬 해줄 거야.)”
“(내가 기대한대로 하다니)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해.)”
교사는 기준을 만족시킨 학생에게 칭찬을 할 것이고 학생은 그 기준을 만족시켜야만 본인이 칭찬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만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자책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나이가 어릴수록 그 기준을 만족시키고자 노력하다 낙담을 많이 하게 되고, 커갈수록 본인이나 또래 집단의 기준에 더 가치를 두어 교사의 기준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잘했다’는 말은 잘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4. 그런데 왜?
그럼 도대체 왜 이 말들은 여전히 절대다수의 교사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사용하기 간편하고, 교사가 그렇게 길러졌고, 대체할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