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 교사, 학생을 보다
오늘은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드라이하게 써볼까 한다.
어제 T.E.T 강의 중간에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요? 체육시간 전에 줄을 서는 건 당연한 건데 좀 구차한 것 같아서요,”
사실 많은 교사들이, 아니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일 것이다. 아이들을 구박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당연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어른이 이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어른(교사)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직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어른이 보호하고 돕는 것이야 말로 이 사회의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중요한 톱니바퀴이다.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책임감이야 말로 어쩌면 교사가 교사로 서 있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하지만 T.E.T, P.D.C 등 많은 교육 프로그램에서 교사가 아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왜일까?
새로운 이야기는 현재의 불만족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압축적인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고 교사라는 한 개인이 이끄는 성장형 교육이 중심이 되어 왔다. 아이들이 어떻게 교육적인 목표에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지가 교사의 역할이라 믿어 온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목표점을 보고 달리는 경주라면 모르겠지만 교육은 그런 경주가 아니다. 목표점을 보는 순간 차안대를 찬 경주마처럼 주변을 보기 힘들어진다. 교육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품고 나아가는 산책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이견이 발생한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말은 훌륭한 기수의 역할이 중요하다. 끌고 가든 때려서 가든 당근을 달든 기수의 역량에 따라 기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책은 어떤가? 산책을 할 때 누군가가 앞을 이끌고 길을 정해주고 재촉한다면, 그 산책은 산책일 수 있을까? 교사의 역할은 퍼실리테이터라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쯤이면 반문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억압하고 괴롭힌 것도 아니고, 다소 잔소리를 하거나 명령하지만 다 자기를 위한 건데 너무 가혹한 비판 아닌가?’
많이 놓치는 포인트이다. 지금 나는 교사의 아동관,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럽게 말하는지 소리를 지르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을 어떤 위치에 놓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비유는 학생을 오랜만에 놀러 온 손님으로 대치해보는 것이다. 손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사 그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것일지라도. 당연한 것에 대해 ‘왜?’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시작일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체육시간에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체육시간을 운영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줄을 서는 것은 그 방법의 세부적인 장면일 뿐이다. 만일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아이들과 함께 약속한 결과로 나온 것이라면 그건 적어도 그 학급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교사의 원활한 수업 진행을 위한 것이거나 질서의식의 필요성에 대한 조급이라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시각이 변하는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의 일부분으로 교사가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 상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리고 교사의 일생이라는 더 긴 시간을 놓고 봤을 때, 도덕적인 판단을 제쳐 두고라도 효율성 면에서 훨씬 수월하고 편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가끔은 돌아가고 싶은 상황도 생긴다. 교사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폭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하는 것과 그것조차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