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번외편] 2. 진짜 시간이 없었는데요?
점심을 먹고 협의실에서 수다를 한참 떤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하고 진지한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5교시는 수학 시간. 지난 시간에 숙제를 안 한 녀석들이 많았다.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기로 했다.
“다음 시간까지 숙제 모두 해와라. 안 해온 녀석들은 끝까지 책임지게 할테니까.”
학급살이나 관계에 대한 이해보다는 나의 생각과 열정이 앞섰던 시절, 나는 책임이라는 낱말을 무척 좋아했다. 내 학급 살이의 모토는
‘하고 싶은 건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 껏 해라. 그게 자유다. 단,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된다.’
였다. 그래서 마음 껏 풀어줬고, 집요하게 질책했다.
교실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던진 첫 마디,
“혹시, 설마, 목숨 걸고 숙제를 안 한 학생은 일어나세요.”
쭈뼛쭈뼛 몇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그게요~”
“일어나라고 했지 말하라고 안 했다.”
단칼 같은 나의 대답에 무언가 말하려던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선생님이 기회를 줬나요, 안 줬나요?”
“주셨어요.”
“그럼 너희가 책임을 질 상황이 맞죠?”
“네.”
나는 일부러 한 번 호흡을 한 뒤 매서운 표정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제 안 한 사람은 남아서 모두 다 하고 갑니다. 대신 틀린 건 두 배로 하세요.”
청천벽력 같은 나의 말에 서 있는 녀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굴에는 당혹감과 난감함이 가득했다. 예나 지금이나 초딩들은 의외로 시간이 없다. 마치면 바로 학원에 가야 하고, 학원을 빠지면 보강을 해야 했다. 더구나 다른 친구들과 달리 두 배로 풀게 했으니 당황할만도 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이건 교육이라기 보다는 나의 복수였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책임지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였다.
“선생님, 시간이 없어서 못했는데요?”
날카롭지만 억울하기도 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민이였다. 툴툴대고 쌀쌀맞은 말을 자주해 유독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녀석이었다.
“시간이 없었다고?”
“네, 진짜 시간이 없었어요. 어제 할머니 제사라서 광명까지 갔다 왔단 말이에요.”
채민이는 알리바이를 대며 나를 쳐다 봤다. 정당하다고 판단했는지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묻어 났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무언의 경고였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진짜 시간이 하나도 없었어?”
“그렇다니까요? 진짜 없었어요. 할머니 제사였는데 어떻게 숙제를 해요!”
채민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주사위는 던져 졌고 나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앞서 이야기한 자유 + 책임의 학급살이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교사인 내가 학생들을 컨트롤하고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내가 힘으로 너희를 누를 수 있으니 자유롭게 하되 알아서 잘해’라는 게 무언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채민이는 그 힘에 도전하고 있었다. 도전은 접수되었고 나는 반격을 시작했다.
“좋아, 어제 학교 몇 시에 마쳤지?”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채민이가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이내 답을 시작했다. 뻔뻔함과 당당함은 한 끝 차이다.
“2시 40분이요.”
“마치고 뭐했어?”
“할머니 제사요”
“아니, 순서대로, 시간 단위로 이야기 해.”
질문과 취조도 한 끝 차이다. 나의 취조는 빨라졌고 날카로워졌다. 채민이의 시간대 별 동선과 소요 시간, 알리바이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그리고 결국 빈틈은 드러났다.
“그럼 할머니 댁에서 제사 시작까지 세 시간이나 있었는데 왜 안했지?”
“책을 안 들고 갔어요, 깜빡하고.”
책이 없었다는 ‘핑계'가 나왔다. 순간 나의 몸에는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눈에는 힘이 들어가고 핏발이라도 튀어 나올 기세였다.
“뭐? 다시 말해봐. 깜빡하고 안 들고 갔다고?”
“네, 깜빡했어요……”
나의 기세에 눌린 채민이의 목소리를 한 풀 작아졌다. 우물쭈물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럴만도 했다. 내가 핑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에 핑계를 댈 바에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빌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였기 때문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야!”
내 고함에 놀란 채민이는 얼어 붙었다. 하지만 미숙했던 나에게 그런 채민이의 상태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나의 분노는 고속열차처럼 브레이크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댁에 가면서 핸드폰 가져가는 거 깜빡했어? 신발 신는 거 깜빡했어? 아니잖아. 그런데 숙제를 해야 할 중요한 책은 깜빡했다고? 그건 실수가 아니라 니가 안 가져간 거지! 어디다 대고 핑계야!”
채민이가 입을 떼지도 못할 때 나의 열변은 이어졌다.
“그리고 책이 없어서 못했으면 제사 끝나고 와서라도 해야지. 엄마가 일찍 자라고 했다고? 핸드폰 게임은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해도 몰래 하잖아! 엄마 말씀을 그렇게 잘 들을 거면 다 들어야지. 마지막으로 다 니 말이 맞다고 쳐도 학교 와서는? 아침 자습 시간,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안 풀었잖아, 인마!”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날카로운 내 고함이 만든 옅은 메아리만 울렸다. 채민이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고 다른 녀석들은 뱀 앞에 선 쥐처럼 얼어 있었다. 소리를 지를 것까지는 없었다는 걸 금방 깨달았지만 핑계에 대한 괘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핑계 대지 말고 두 배로 다 풀고 가라. 집에 갈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이 데리러 오셔도 못 갈 줄 알아.”
채민이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털썩 주저 앉았다. 수업이 마친 후 채민이는 숙제를 시작했고, 7시가 넘어서야 다할 수 있었다. 나는 어둑해진 거리를 따라 채민이를 집에 바래다 주었다. 돌아오는 나에게는 후회보다는 어려운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말을 지킨 것에 대한 뿌듯함과 타협하지 말자는 다짐이 가득했다. 그리고 감히 나에게 도전했던 녀석을 결국 누른 뒤에 사랑으로 보듬었다는(라면을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는 걸로?) 성취감이 더 컸다. 밝은 가로등만 볼 뿐 주변의 짙은 그늘을 보지 못한 채 걷는 밤길 같았다.
나는 내가 쏟아낸 말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더 우세했다. 그러나 중요한 걸 빼먹고 있었다. 인간의 동기, 그리고 감정. 나는 감정과 공감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그저 논리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말싸움에서 이겼을지 몰라도 관계에서는 실패했다. 나처럼 논리적으로 상대를 밀어 붙이는 말을 하임 기너트나 토머스 고든 박사는 ‘캐묻기'라고 칭했다. 상대에게 논리 싸움을 걸어 허점을 찾은 뒤 굴복시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명백하게 문제 해결이 아닌 처벌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보다는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 해야 했다.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숙제를 할 시간이 없어서 많이 초조했겠네. 하지만 선생님은 충분한 시간이 그 전에도 있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희가 숙제를 안 하면 선생님이 그부분을 다시 알려줘야해서 번거롭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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