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4탄] 8. 사실 대신 감정을 말하라
풋풋함과 열정만 넘치던 24세 신규 시절이었다. 나의 기간제 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학교에서 유일한 20대 남교사, 거기에 운동 좋아하고 잘하는 6학년 체육 전담, 학생들에게는 물론이고 선배들, 학부모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기 과감하게 잘난 척 해본다.)
체육관이 없던 학교였기에 나는 아침에 나가면 점심 시간이 되어서야 건물에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면 으레 학생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운동장은 늘 나와 공을 차는 아이들로 붐볐다. 나도 즐거웠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축구부가 있었기에 녀석들과 하는 축구는 제법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동장에서 거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현준이(가명)가 문제를 일으켰다. 축구를 하다 다른 친구에게 큰소리로 못한다고 비난을 하며 욕을 한 것이다. 내가 말리러 가는 사이에 상대편 아이가 주먹을 날렸고 둘은 엉켜서 싸우기 시작했다. 겨우 진정을 시킨 뒤 담임 선생님께 인계를 했다. ‘사내녀석들은 꼭 놀다 승부욕에 싸운다니까.’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다음날, 일이 커지고 있음을 알았다. 화가 난 양측 부모가 담임 교사를 찾아 왔고 다자간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나는 교실로 찾아 갔다. 공기가 무겁고 여기 저기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들이 보였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제일 가까이 계셨잖아요.”
안면이 있는 현준이 어머니가 말했다. 술자리(그 당시에는 체육부 회식 등에 학부모와의 자리가 제법 있었다.)에서 말도 잘 통하고 시원시원했던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가 흥분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차분하게 설명하려 했다.
“아, 어머님. 그게 아니고 같이 놀다가 둘이 좀 다툰 겁니다. 현준이 녀석이 먼저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소리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쪽으로 가서……”
그 때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인데 현준이 어머니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니, 선생님. 지금 우리 현준이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네?”
“현준이만 잘못했다는 거 같네요.”
“아, 어머님, 그게 아니고요. 현준이만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말씀드리다 보니……”
“맞은 건 우리 아이인데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섭섭하네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증인이었고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 해야 했다. 현준이만 잘못했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 뒤에 중언부언 일을 더 설명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교실을 나온 뒤에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공격 당한 걸까? 내가 정말 실수한 걸까? 머리가 복잡하고 답답했다. 그 뒤에 괜히 현준이를 볼 때면 찝찝했다.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더 황당한 건 나중에 우연히 만난 현준이 어머니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흥분했다고, 앞으로 현준이를 더 잘 부탁한다고. 사과한 쪽은 사과하며 마무리를 지었지만 공격당한 나는 생채기로 남았다.
1. 사실이라는 배
사실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사실이 없다면 이 사회는 결국 개인의 욕망만이 남을 것이다. 힘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 그게 바로 사실이다. 요즘은 팩폭(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유행할만큼 팩트가 중요시 되고 있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갈등이나 문제 상황에서 사실을 중요시한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해결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부모와의 대화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학생들에게는 가끔은 교사의 권위나 힘으로 밀어부치기도 하지만 성인인 학부모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 상황으로 만난 학부모에게 교사는 사실 관계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사실 만능주의는 예상치 못한 반발을 낳으며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우선 사실이란 논리적인 정당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 논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만들어낸다.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설명하다 보니 원인과 결과가 나뉘고, 결국 원인이 도덕적으로 잘못했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듣는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라도 공격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같이 논리를 동원해 방어하거나 정당화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설명하려던 게 언쟁으로 변하고 만다.
또한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완벽한 사실을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객관적인 사실이란 과연 존재할까? 오랜 철학적 논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도 매일 부딪히는 한계이다. 예를들어 보자.
“쟤가 먼저 제 어깨를 쳤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어요.”
“아니에요. 저는 어깨를 친 적이 없어요. 뜬금없이 쟤가 소리를 질러서 저도 욕을 한 거에요.”
이런 갈등 상황에서 교사는 어떻게 접근을 할까? 사실을 중시하는 접근이라면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
“혹시 본 사람 있니?”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의 신뢰성에 대해 상대 학생이 반박하고 나선다면? CCTV로 볼 수도 없고 답이 없다.
이 상황을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설사 어깨와 학생이 부딪힌 게 확인 되더라도
“OO이가 XX이의 어깨를 먼저 쳤어요.” 와
“OO이가 실수로 XX이의 어깨에 부딪혔어요.”
는 전혀 다른 사실이 된다. 과연 교사는 사실관계를 학부모에게 전달할 때 평가적인 단어를 완벽하게 빼낼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하면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는 사실이라고 부르지만 해석의 여지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어하는 학부모측에서는 다른 해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중심으로 설명하다보면 상황을 중요시 하게 된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상황의 정확성에 몰두하면 상황의 주체인 사람이 소외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학부모에게 중요한 건 내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다. 그런데 외부의 상황만 이야기하는 교사는 미워보이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반문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아니다. 서두에 언급 했듯 사실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당연히 우리는 사실 위에서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건 사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사실이라는 배는 잔잔한 감정의 물결 위에서만 항해한다.
2. 옳은 것과 통하는 것
어린 아이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맛있는 요리? 밥 먹으면서 영상 보여주기? 나는 배고픔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아이는 배가 고파야 밥을 맛있게 먹는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도 배부른 아이는 먹지 않는다. 학부모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사가 아무리 합리적으로 부드럽게 말해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학부모는 듣지 않는다. 감정의 풍랑이 사실이라는 배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감정의 바다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단 듣고 공감해줘야 한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Getting more)]에서 스튜어트 다이아몬드는 감정적 지불(Emotional Pay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지극히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이 협상가가 감정의 힘을 강조하는 점이 흥미롭다. 감정적 지불이란 상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감정에 신경을 쓰고 에너지, 시간을 들이는 걸 말한다. 학부모와의 대화에서도 성패를 가르는 열쇠이다.
물론 이 방법은 빠른 해결책은 아니다. 전적으로 옳은 해결도 아닐 수 있다. 들어주고 감정을 읽어주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리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학부모를 완벽한 평정 상태로 만들지 못하더라도 액션이 필요하다. 학부모 본인의 진정 여부와 별개로 교사의 이런 시도는 학부모에게 ‘선생님이 그래도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구나.’라는 이미지를 남긴다. 이미지는 평가를 만들고 결국 관계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 방법은 또 다른 장점이 있다. 바로 학부모의 진의를 파악하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가 항의를 하면 교사는 으레 ‘이런 문제에 대해 이게 불만이구나.’라고 짐작하고 거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은,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학부모에게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교사가 그동안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걸 모르고 교사가 예단하고 방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교사가 수세에 몰리거나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격랑이 숨기지 못하는 진의와 감정의 골을 잘 살펴볼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교사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자잘못이 확실하면 빨리 알려주고 끝내고 싶다. 시간과 감정을 들이기에 너무 바쁘고 힘들다. 그러나 옳은 것과 통하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게 교사의 운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통하는 것을 추천한다.
3. 밸런스와 선택
이쯤 되니 중요하다는 사실이 홀대 받는 느낌이다. 감정이 대화의 본질이요 전부라는 인상을 준다. 오해다. 불완전하더라도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고 강하다. 다만 감정 없는 사실은 연료 없는 자동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 없는 감정은 뒷담화 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사실과 감정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대화는 전위적 예술에 가깝다. 사실과 감정을 어느 정도로 섞을지, 순서는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궁극적으로 어디에 방점을 둘 것인지 등 다양한 변수를 교사가 판단하고 조정하고 활용해야 한다. 교사는 로봇이 아니라 마에스트로에 가까운 역할을 요구 받는다. 따라서 사실, 감정의 밸런스는 상황에 의존할 뿐 정해진 규칙은 없다. 다만 그 밸런스를 맞출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존재한다.
우선 빠른 해결을 할지, 바른 해결을 할지 선택해야 한다. 당연히 바른 해결이 중요할 것 같지만 어떨 때는 빠른 해결에 의지해야 할 때도 있다. 가령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여러 일이 겹쳤을 경우 바른 해결만 지향한다면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선택이 중요하다.
또한 관계의 지속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학부모는 대부분 일 년 간 만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얼마의 기간동안 더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혹은 학년을 넘어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지 고려해보는 것이 좋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거나 관계를 오래 지속해야 한다면 힘들더라도 많은 감정적 지불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인스턴트성의 관계로 끝내고 싶다면(이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교사도 에너지와 시간이 유한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에 알맞은 정도만 감정적 지불을 하면 된다.
중요한 고려 사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나 자신의 상태다. 나에게 에너지가 얼마나 있는지, 혹시 다른 상황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내 에너지 통장의 잔고가 100원 밖에 없는데 5000원 짜리 대화를 시도한다면 결국 마이너스 대출이 생기거나 거래 실패가 될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