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3탄] 3. 교사여, 학생의 과제를 분리하라
앞의 글에서 교사가 학생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이고 그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1. 학생의 과제에 들어가는 건 아무 소용없다.
한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수업 시간이다. 교사는 학습 문제와 그 시간의 중요한 개념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활동을 소개한 뒤 첫 번째 활동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자, 그럼 활동 1을 시작해볼까요?”
“선생님!”
“응, 무슨 일이니?”
교사는 활동 시작 때 손을 든 학생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그 학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이 활동 꼭 해야 해요? 안 하면 안 돼요?”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마라......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에서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예상되는 반응들은 이렇다.
“하라면 해야지, 무슨 말이 많아?”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단다. 어서 해라.”
“이거 얼른 끝내면 쉬는 시간 더 줄게. 어서 해볼까?”
“이번 시간 학습 목표가 원의 넓이를 구하는 거지? 그걸 하려면 이 활동을 해야지. 그래, 안 그래? 선생님 말이 틀렸니? 그럼 어서 시작해.”
입장을 바꿔보자.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에게 위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이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활동을 할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행동은 동기와 상관없이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니까) 물론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 쌓인다면 학생은 교사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교사에게서 학생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다.
2. 교사는 억울하다.
그런데 교사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아니, 내가 나쁜 마음으로 이야기 했나?’
위의 대답 중에 학생에게 해를 끼치거나 학생을 괴롭히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 있을까? 장담컨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두 학생의 올바른 성장과 바른 교육을 위해 한 대답들이다. 그런데 교사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학생과의 관계에 역효과를 낳는 것이다.
교사가 조금 다른 입장에서 항변할 수도 있다.
‘저런 말을 들으면 나라고 화가 안나? 그럼 부처처럼 허허 웃고 있으라고?’
교사는 학생의 말을 듣고 왜 기분이 나쁠까? 학생이 활동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교사 자신의 수업이 지루하고 잘못되었다는 평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활동의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싫어하는 건 학생의 과제이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롯데는 별로야. LG가 더 좋은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설득하거나 롯데를 좋아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실에서, 학생에게는 강요한다. 교사 자신의 힘이 더 강하다는 관계에 대한 수직적 관점과, 학생의 (교사인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올바른 행동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 대한 수직적 관점과 책임감이 교실에서의 과제 분리를 유난히 더 힘들게 한다.
그렇다고 학생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어긋난 행동을 할 때 교사는 자신의 과제가 아니므로 방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이 가능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다만 그 노력의 방향을 제대로 정해야 한다. 학생의 과제를 대신 해결하거나 결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책임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니라 선택과 책임의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사는 학생의 과제에 개입해 해결해주는 것이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여기지만 아들러는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 자체가 가장 자기중심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3.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좋다. 어렵게 학생의 과제에 뛰어드는 것을 자제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무작정 참고 넘어가라는 말인가? 아니면 부글부글 끓는 속을 부여잡고 회피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간단하게 서술해볼까 한다.
1단계 : 멈추기
우선 멈추어야 한다. 감정이 불편한 학생은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접한 교사 또한 흥분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우선은 교사가 즉각적으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멈추어야 한다. 토마스 고든은 [교사역할훈련(Teacher Effectiveness Training)]에서, 하임 기너트는 [교사와 학생사이]에서 학생을 멀어지게 하는 교사의 말들에 대해 언급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에 언급한 상황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이 활동 꼭 해야 해요? 안 하면 안 돼요?”
1) “하라면 해. 뭔 말이 많아.” : 명령
2) “안하면 혼난다.” : 경고
3) “학생이 공부를 안 하겠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 훈계
4) “니 짝은 벌써 저만큼 했는데 너도 어서 해야지?” : 비교
5) “다 하면 사탕 줄게. 얼른 하자.” : 달래기
6) “선생님이 딱 보니까 하기 싫어서 머리 쓰는구나? 선생님 눈에는 다 보여.” : 판단
7) “하기 싫다고? 이유가 뭐야? 지루하면 안 해도 되니? 그럼 넌 지루한 건 전부다 안 해? 그래도 되는거야? 정말 지루하지만 하는 건 없어? 이거 안 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 캐묻기
8) “그럼 하지마! 니 마음대로 해!” : 비판
9) “언제는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하시네요?” : 비아냥
10)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넌 잘하는 녀석이잖아. 얼른 해.” : 칭찬
11) “일단 잠깐 눈을 감고 이 활동을 왜 해야하는지 생각해봐. 그리고 첫 문제를 풀어보는 거지. 하나를 풀고 나면 성공 경험을 하기 때문에 뒤의 문제들도 하고 싶어질 거야. 선생님이 시킨대로 해봐.” : 해결책 제시
놀랍게도 위와 같은 말들은 감정적으로 힘든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이다. 오히려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에 대한 기대와 믿음, 호감을 떨어지게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우리가 생활 속에서 쉽게 사용하는 말들이 무척 많다. 그렇기에 피해서 말을 하려기보다는 일단 말을 멈추는 것이 더 현명하다. 물론 객관적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학생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무조건 멈추어라.
2단계 : 듣고 공감하기
말을 멈추었으니 공은 학생에게로 넘어갔다. 학생 소유의 과제에 말려들어가지 않는데 성공한 교사의 역할은 바로 듣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공감이라는 것이 참 어렵다. 그렇다면 우선 그냥 듣기만 해도 된다.
먼저 일대일 대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좋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자칫 힘겨루기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학생의 말과 행동에 넘어 가지말고 우선 링에서 내려와 그 학생과 따로 마주한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듣는다. 이 과정에서 리액션을 섞어주면 더 좋다. 무언가 해결책을 주거나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듣는다. 자신이 있을 경우 공감을 해주면 효과는 배가 된다. 그렇게 상대의 과제가 명확해지고 학생의 감정 온도는 내려간다.
3단계 : 도와주기
2단계에서 잘 들어주면 학생의 감정 온도가 점차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손이나 손가락으로 표시하는 픽토그램을 활용해도 좋고, 그게 아니라도 비언어적인 신호들(목소리 톤, 표정, 한숨, 말의 속도 등)에서 눈치 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같은 말이 반복되거나 말이 없어지는 건 3단계로 넘어 가도 좋다는 신호다. 그 다음에 할 것은 학생이 본인의 과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서 명백히 서술한다. ‘돕는’ 것이다. 많은 교사들이 2단계까지 잘 하고도 이 부분에서 비효과적인 방법을 택한다. 학생의 과제에 공감했으니 그걸 해결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글의 앞부분에서 이야기 했던 교사의 책임감이 발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과제는 그것에 관한 선택과 책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의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개입해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교사는 해결사가 아니라 조력자, 혹은 퍼실리테이터가 되어야 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렵지 않다. 문제 해결의 시작, 방법, 결과를 누가 선택하는지를 보면 된다. 해결사가 되려는 교사는 직접 문제 해결에 개입하고 그 방법을 실행하며 결과 또한 본인과 학생의 공동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력자가 되려는 교사는 다양한 문제 해결 방법들을 마련한 뒤 스위치를 준비한다. 그리고 어떤 스위치를 언제 켤지, 나아가서 켤지 말지는 학생이 선택하게 한다.
만약 학생이 비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서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것 또한 학생의 몫이다. 그 때 힘들어하는 학생을 교사는 다시 멈추고, 듣고 공감해주고, 도와주면 된다. 아직도 이런 교사의 자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되묻고 싶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같이 과제에서 허우적대며 실패에 대해 분노하거나 개입하는 교사와, 나의 감정을 들어주며 적절하고 다양한 조언을 준비해 선택하게 하는 교사 중 어떤 교사에게 더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가? 나는 전자의 교사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법의 문장이니 효과적인 멘트니 하는 것들을 신뢰하지도, 선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해결사가 아닌 조력자의 길로 들어서려고 노력할 때 많이 연습했던 말이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니 생각은 어때?”
그리고
“선택과 결과는 너의 몫이야.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선생님의 생각이 있는데 참고로 들어볼래?”
이 말들은 교사를 조력자의 길로 이끌 뿐더러 학생에게는 교사가 자신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제시한 방법은 나에게,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정답은 될 수 없다. 사용하는 사람, 상대 학생, 환경에 따라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언제나 위와 같이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잔소리도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멈추고, 들으며 공감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잔소리가 되더라도, 학생의 과제를 끌어안더라도 ‘내 생각에 이건 꼭 해야 할 말’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때는 해야 한다. 그 판단이 잘못 되어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또한 ‘나의 과제를 내가 끌어안아 생긴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임지면 된다. 신중하게 고려해봐도 해야겠다면 상대의 미움이나 비호감을 각오하더라도 개입해서 대신 결정하자. 그것 또한 나의 ‘선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