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책을 만나다] 희랍인 조르바
아래의 글은 2006년, 남들은 열심히 임용 공부할 때 혼자 인생 공부하며 쓴 글이다.
지금 보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부끄러운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을 소개하려는 진정성은 가장 충만한
시절이라 과감하게 그.대.로 옮긴다. 내 인생을 바꾼 책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꼭 넣을 그런 책!
카를 포퍼가 그랬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지만 늙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면 더
바보다.' 동감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젊어서 조르바를 사랑하지 않으면 바보지만 늙어서도 조르바를 사랑하면 더 바보다.'
'하지만 그런 바보는 행복하다.'
오그라드는 손발은 읽는 사람의 몫!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Times with a shining star
한 달에 걸친 만남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그와의 시간은 나를 힘들게 했다. 하룻밤에 다 읽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충동을 억제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모독, 인생에 대한 무지, 자유
에 대한 왜곡이 아닐 수 없을테니... '무슨 말라빠진 개소리야! 악마나 물어가라지!' 호통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기적인 내 심장에 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본 수많은 별들은 내 가슴에
유일한 것들로 내려 앉았다. 진한 샐비어 향을 남긴채...
HIs story
차가운 불로 몸을 태우던 시절이 있었다.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불은
점점 커져갔다. 많은 책들과 생각들 속에서 여러가지를 보고, 알고, 이해하고, 깨달았다. '철학'이라
는 거창한 이름의(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결국 철학이란 삶과 세계에 관한 각자의 생각일 뿐
인데 어느새 가장 고차원적인 '학문'으로 둔갑했으니 말이다.) 슬론 머신을 조작하는 神이라는 이름
을 발견한 후 나의 불은 색깔을 바꾸었다. 짙고 투명한 검은색의 그 불은 나의 심장과 머리의 주인
이 되었다. '절대', '진리', '객관'이라는 가증스러운 빛의 문장을, 말씀을 가열차게 태우고 또 태웠
다. 神이 내게 준 유일한 은덕이 있다면 그것은 敵이리라. 니체의 칼을 손에 쥐고 데리다의 눈을 품
은 나는 끝없이 전진, 또 전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내 걸음도 무거워졌다. 가슴을 태우던 불도 재로 다 소진하고 얼마 남지 않
은 노란색 불빛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 속에서 가증스러운 빛을 모두 태우고 나니 무척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가벼울 뿐 무게가 없는 정신은 쉽게 날아가버리기 마련이다. 막막한 니힐리
즘, 그 허무의 숲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의 칼이 약속한 초인을 기다리며... 그러나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대가 부르는 초인은 어떤 모습으로 온단 말인가. 히틀러를 초인으로 둔갑시키는
세상 쓰레기들의 아비규환 속에서 얼마나 더 악취에 코를 막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Zorba came to me
행운의 여신은 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데 거기에
부딪힌 사람을 흔히 행운아라고 부른다. 나는 그녀의 명랑한 충돌에 머리가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환희의 아픔이었다. 새디스트여, 축복을 받으라!
조르바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깡마르고 키가 훤칠한 이 마케도니아인은 단숨에 나를 휘어잡
았다. 존경할 수는 있으나 따를 수 없고, 경외할 수 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던 니체적 초인은 조르
바의 산투리 소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짜라투스트라처럼 난해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렇다고인간을 사랑할 수 없기에 그냥 지나쳐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마시고, 일하고, 노래하고, 춤 춘다. 그런 그를 초인 이상의 초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직선적
이며 충실한, 그리고 열정적인 삶의 태도이다.
"나는 이미 지난 일은 어제로 끝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
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뿐입니다. 나는 매순간 자문합니다. '조르바, 지금 너는 뭘 하
고 있느냐?' '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너는 무엇을 하느냐?' '일하고 있네' '열심히
하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다른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자네와 그 여자밖에 아무도 없는거야. 실컷
키스하게'"
뛰어난 지성과 내적 강함을 지닌 주인공과 야생적인 조르바의 기묘한 동거는 작품의 시작이고 전
부이며 끝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과부를 보면 안타까워 눈물 흘리고, 자신의 생각이 말로 표현이 안
되면 산투리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사내. 내일이 없는 듯 여인과 사랑을 나누다가 일에 열중하면 먹
지도 자지도 않는 사내. 그의 생명력을 보면 우리의 삶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당신이 묶인 줄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를지는 모르지요. 그래요. 두목, 당신은 긴 줄에 매여 있
습니다. 당신은 그 사이를 오가면서 그걸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끈을 잘라버
리지 못해요. 그런 끈은 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분명 모든 것을 얻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아는 것은 이해하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이해하는 것은 느끼는 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느끼는 것은 行하는 데에 미
치지 못한다. 자명한 것은 단순하지만 진정 그것을 환하게 태우는 자는 行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책에 '질리기로' 결심한 주인공의 심정이 이러했으리라.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차선책을 택한 것
이다.
"어렸을 때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없었지요. 돈이 부족하니 한꺼번에 많이 살 수
는 없고, 조금만 사서 먹으면 목구멍에서 감질만 나는 거예요. 하루 종일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그러면 입 안에 군침이 도는 게 정말 죽겠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슬며시 화가 났습니다. 어쨌
든 내가 버찌에게 희롱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서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은화가 한 닢 있더군요. 슬쩍했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를 한 소쿠리나 샀지요. 나는 그것을 도랑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목구멍으로 넘
어올 때까지 쑤셔넣었어요.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났어요. 두목, 결국 나는 몽땅 토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
어요. 나는 마침내 구원을 받은 겁니다.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아도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너
랑은 별 볼일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아요."
노희경 작가의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라는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
잃을 것이 없는 자는 크게 얻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소한 아픔이 두려워 뒷걸음친다. 그
리고는 언젠가 후회하고 만다. 뱃 속에 수 십 마리의 악마와 천사를 다스리며 살아온 조르바도 예순
나이에 나이 먹는 것이 두렵다고 했거늘, 과연 우리는 서른 이전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는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 대신 완벽하게 충실한 삶을 살 필요는 있다. 그게 흉내만일지라도 말이
다.
"하느님은 악마 두목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Zorba and Don Quixote
나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계속 한 사내가 떠올랐다. 세르반테스가 탄생시킨 유명인, '라 만차의 돈
키호테'이다. 흔히들 돈 키호테라고 하면 정신 나간 사나이, 풍차와의 전투, 산쵸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의외로 돈 키호테를 온전히 읽어 본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와 언행을
비웃으며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만연하던 기사도 문화와 문학의 병폐를 꼬집고
자'돈 키호테'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리고 흔히들 '돈 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지평을 연 작품으로
꼽는다.
그런데 우리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평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돈 키호테는 선험적 인식에 대한 통쾌한 풍자이다.'
그렇다. 그는 돈 키호테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다. 돈 키호테는 단순히 희화된 시대착오적인 기사
상이 아니라, 세상에 만연한 선험적 인식을 풍자하는 '초인'이었다. 초인의 기본 조건은 모든 선험
적, 경험적인 도덕, 법칙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돈 키호테는 세상의 법칙을 자기 내면의 법칙으
로 승화시킨 진정한 초인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그를 비웃은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불
쌍히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동네 신부와 이발사에 의해 집으로 잡혀가고 만다. 그것은 세상과 앞선자의 충
돌, 그리고 앞선자의 패배를 상징한다. 그의 혜안은(물론 작품에서는 과대망상으로 표현되는) 세상
에 속하기엔 너무나 색이 달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조르바는 다르다. 그는 세상 속에서 초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안다. 어쩌면 그는 선대
인 돈 키호테의 착오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 아닐까? 내가 그를 진정한 완성형 인간으로 생각하는 이
유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쩌겠습니까? 기껏해야 생명을 가져갈 수밖에 더 있습니까? 좋아요.
나를 데려가세요. 그래도 좋아요. 나는 분풀이도 실컫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컫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의 은총은 필요없어요!'
시대가 변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지만 어쨌든 객관적 지식, 진리는 神과 함께 죽었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행위 주체자인 나에 의해 해석, 부여되는 의미가 중요하다. 따라서 내가 느끼는 조르
바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조르바는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르바를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해석과 의미에 입각하여,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조르바는 진정한 인간이며, 구
원자이고, 태초적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