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함께읽기] 2탄. 고독의 화가 뭉크
#1. WHO IS THAT?
영화 <스크림>
이 가면 익숙하시나요?
영화 <나 홀로 집에>
이 표정도요?
이 두 영화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 있죠.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네. 바로 뭉크의 <절규>입니다.
안그래도 유명한 이 작품이 더 유명해진 건,
2012년, 당시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에 <절규>가 낙찰되면서부터였죠.
1억 1992만달러, 한화 약 1500억인데요. 지금은 이를 뛰어넘는 경매가의 작품들이 나왔지만요.
(미술의 세계란 상상 이상입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괴함과 우울함.
도대체 뭉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요?
그리고 뭉크의 삶은 도대체 어땠던 걸까요?
#2. 잘 그린 건가요?
뭉크의 그림은 사진처럼 사실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절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은 바가 있습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던 거지요.
뭉크가 수첩에 적어두었다는 그날의 일기,
아래의 문장을 읽고 작품을 다시 감상해 보겠습니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 기분이 우울해졌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죽을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핏덩이처럼 걸려 있는 구름, 검푸른 협만과
마을 위에 칼처럼 걸려 있는 구름 너머를 멍하니 쳐다봤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공포에 떨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이 엄청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절규’가
자연 속을 헤집고 지나는 것이 느껴졌다.”
- 에드바르 뭉크 -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3년)
기괴하고 잘 못그린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절규>가 좀 색다르게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왜 뭉크는 이 그림을 느낄 때 기분이 우울했던 걸까요?
그건 뭉크의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2. 어린 뭉크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르웨이는 국토의 95퍼센트가 야생의 땅이고,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인 나라이지요.
이런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노르웨이인들은 고독에 익숙한 편입니다.
애드바르 뭉크 <아픈 아이> (1885년)
게다가 뭉크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겪었습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때는 누이 소피에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이별의 아픔을 잊지 위해 종교에 매달립니다.
뭉크에게도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학습을 시킵니다.
안그래도 내성적이던 뭉크는 친구들도 만날 수 없어 더욱 수줍은 아이로 자랍니다.
뭉크가 처음부터 어두운 그림을 그린 건 아닙니다.
뭉크는 '칼 요한 거리'라는 같은 장소를 두 번 그렸습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정반대지요.
애드바르 뭉크 <칼 요한 거리의 봄날> (1890년)
위 작품의 이름은 <칼 요한 거리의 봄날>입니다. 아주 화사하죠?
뭉크가 파리에 유학을 가서 배운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하지만 2년 후, 뭉크는 같은 작품을 다르게 그립니다.
애드바르 뭉크 <칼 요한 거리의 저녁> (1892년)
우울한 감정을 담아 그린 저녁풍경입니다.
기괴하고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그림이 무섭게 느껴지는데요.
오른쪽에 혼자 서 있는 검은 남자가 보이시나요?
뭉크는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외로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칼 요한 거리의 봄날>도 화사해서 좋지만,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이 뭉크의 마음을 더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3. 사랑의 아픔
청년 뭉크가 우울하고 슬펐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실연입니다.
뭉크는 가족들과 여름휴가로 바다에 놀러 갔다, 밀리라는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합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크리스티아니아 사교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매우 똑똑한 신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노르웨이 최초의 여성 칼럼니스트로서, 패션과 요리에 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애드바르 뭉크 <여름 밤의 꿈/목소리> (1893년)
하지만 둘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밀리는 결혼한 여자였습니다.
밀리가 정략결혼을 했기에 진정한 사랑은 자신이라고 뭉크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양심의 가책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달 못가 둘은 멀어지고, 뭉크는 수년 동안 그녀를 마음 한구석에서 그리워합니다.
그로부터 5년 뒤, 뭉크는 파리 유학 중에 밀리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고, 샹송 가수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뭉크는 밀리가 자신을 진정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을 보며 배신감에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이 사건은 뭉크의 마음에 슬픔이 더 깊게 고이게 만들었습니다.
가족의 죽음과 사랑의 실패로 슬펐던 뭉크의 젊은 시절,
그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자연을 볼 때 아름답게 느껴졌을까요? 괴롭게 느껴졌을까요?
노르웨이의 대자연에서 타오르는 노을을 보고 그린 작품이 바로 <절망>과 <절규>입니다.
애드바르 뭉크 <절망> (1892년)
먼저<절망>은 <절규>의 토대가 된 작품입니다.
불안한 심리 상태를 가졌던 20대 뭉크는, 빨갛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자연의 비명'이라고 말했고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강렬한 색으로 칠해놓긴 했지만, 아직은 풍경이나 사람들이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5년), 판지에 파스텔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5년), 석판화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5년), 판화로 찍음
애드바르 뭉크 <절규> (1895년), 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
뭉크의 <절규>는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조금씩 다른 재료, 다른 버전으로 그렸지만
모두 뭉크의 당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시기엔 자신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신의 모습이나 집 안의 물건, 자연을 그리는 게 대부분이었죠.
폴 고갱 <설교 후의 환영> (1888년)
그나마 상징주의 화가들이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그들은 자신이 본 장면이 아니라 신화 속 장면을 그렸습니다.
위의 작품은 폴 고갱의 작품으로 천사와 야곱이 싸우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간딘스키 <노랑, 빨강, 파랑> (1925년)
하지만 뭉크는 자기가 진짜 본 장면을 변형시키며 그림을 그렸지요.
그렇기에 유성혜 작가는 에드바르 뭉크를 '표현주의 미술', 더 나아가 '추상미술'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4. 뭉크 = 절규 ?
우리는 뭉크 하면 <절규>, <절규>하면 뭉크만 떠올립니다.
애드바르 뭉크, 오슬로 대학에 남긴 벽화
하지만 뭉크는 죽을 때, 오슬로 시에 회화 1150점, 판화 17800점 등 총 2만 8000여 점의 예술품과 개인 자료를 기증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입니다.
뭉크의 다른 작품들은 2편인 다음 글에서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