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단상] 책, 왜 읽으세요? 책, 왜 읽히세요? #02 나와 책 이야기(1)
#Intro
여러분은 질문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나요? 정답이 정해진 질문이라면 자료를 찾아보거나 책을 읽겠지만, 세상에는 정답을 알기힘든 질문들이 많습니다. 에콜에 글을 쓰는, 그리고 글을 읽는 수많은 선생님들도 질문들과 함께 삶을 걷고 계시겠지요.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교직에 들어선 순간부터 항상 고민했습니다. 책읽기를 방관해보기도,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보기도 하며 나름의 답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커다란 질문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보다는 '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깊고 중요한 질문일수록 해답은 이미 가까운 곳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책을 읽어왔니?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도 책과 절교하지 않고 지금껏 소중한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니?라고 말입니다.
#1
나는 삼남매 첫째다. 우리 집은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시골집이었다. 셋이 사용하는 방은 두 평도 안되는 크기였고,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엔 커버린 키 때문에 다리를 굽히고 잠을 자야할 정도였다.
그 작은 방에서 우리 셋은 꼭 붙어있었다. 그건 서로를 끔찍히 아껴서 라기보단, 꼭 붙어있어야 겨우 놀 수 있는 작은 공간만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함께라 심심하지 않고 늘 놀거리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심심할 시간도 필요했다. 나는 늘 '나'만의 것을 강구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나'만의 것은 없었다. 모든 게 '우리'의 것이었다. 크레파스도, 장난감도, 아이스크림도. 쌍쌍바를 쪼개지 않고 혼자 다 먹는 상상을 그때 참 많이 했다. 오롯한 나만의 것, 나만의 공간을 찾는 건 일종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구석을 좋아했다. 옷장 속이나 책상 밑 같은 곳 말이다. 그중에서도 책상 아래는 나의 최애 공간이었다. 동생들은 갑갑하게 책상 아래 기어들어가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곳은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이불 위에 책을 몇 권 괴어 책상을 뒤덮으면, 책상은 근사한 텐트가 되었다.
나는 근사한 텐트 아래 쭈구리고 누워 책을 읽곤 했다. 책상 아래쪽 책장에는 이모가 보내준 전래동화 전집 50권이 꽂혀있었다. 우리 집에 유일한 동화책이었다. 나는 그 책들을 스무 번쯤 반복해서 읽었다 . 새로운 이야기들은 항상 방구석 여행을 근사하게 만들어줬다. 어린 나는, 책을 읽는 재미만큼이나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고 있었다.
#2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읽기에 대한 관심은 줄어갔다. 세상에는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게 정말 많았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는 재미있는 것을 골고루 하느라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진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싫어한 건 절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엔,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야.’ 라는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책과 나 사이를 가른 건 묘한 죄책감이었다. 어른들은 언젠가부터 "책 읽을 시간이 어디있니?"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책을 읽다 혼난 적이 있었다. 왜 공부 할 시간에 책을 읽느냐는 것이었다. 그날은 중간고사 끝난 날이었고, 선생님은 특별히 오늘만 허락해주겠다 했다. 책은 시간이 많을 때 읽어야 하는 것, 허락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것이 되어 있어다.
책은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닌 것 같았다. 일분 일초를 쪼개 살기를 강요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책읽기는 생각없는 미친짓이었다. 읽을거라면 그 귀중한 시간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어야 했다. 참고서거나, 고전문학이거나, 입시나 공부법에 관련된 책.
#3
삶의 큰 사건들은 우연한 용기에서 시작된다. 단편소설이야 금세 읽으니까,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고등학교 독서모임처럼.
수학의 늪에서 허덕이는 여름, 학교 게시판에 공고가 하나 붙었다. 전후단편소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토론모임을 방학동안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신규 국어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동아리였다. 어딘가는 도움이 되겠지 싶어 큰 기대 없이 참가했다. 애초에 전후단편소설이라니, 여섯 글자만으로 이미 노잼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임은 생각 외로 정말 재미있었다. 일단 함께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고등학생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책도 재미있게 변신시킬 수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책을 ‘함께’ 읽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꼭 재미있는 책만 골라서 읽지 않았다. 취향에 맞지 않는 책, 관심 분야가 아닌 책, 너무 어려운 책. 그들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만날 수 없었을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건 ‘항상’ 즐거웠다.
(다음 단상)
(그녀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