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 부진교사의 체육수업.
2013년, 대구에서 처음 교직에 들어오며 배구를 시작했다.
언론에서 지적하는 과한 수준이 아닌 근무를 성실히 수행한 뒤
희망자에 한해서 대회에 참가하는 정도였다.
그때는 배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2시간 동안 배구공을 손에 만져보는 것이 다섯 번이 안될 정도로
배구라는 운동의 참가 보다는, 단합을 위한 행사에 참가한다는 의의가 컸다.
서울에서 다시 교직을 시작하며 근무하게 되었던 학교에서는 배구를 전혀 하지 않았고.
2018년, 새로 옮긴 학교에서는 5월에 배구 대회 참가를 하게 되었다.
말이 대회이지 사실 배구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몰랐던 상태에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이번에도 선생님들과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좋아서 배구 경기 하러 오겠냐는 제안에
몇년 전 대구에서 형편 없던 나의 실력은 까맣게 잊고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다.
역시나 서브한 공이 네트는 택도 없고 우리편 경기장 반을 넘기기도 쉽지 않았다.
형편없는 실력에 주장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으며 (....)
방금 물 마시고 들어왔는데 또 자꾸 물 마시러 다녀오란 제안을 받았다.
눈치를 채고 후보 선수가 되어 열심히 응원했고 물을 날랐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 기분이 씁쓸했다.
여러 분야에서 내가 부족한 상태임을 자주 느끼지만,
배구는 특히나 내가 정말이지 부진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제대로 받았다.
잘하고 싶긴 한데 마음대로 안되니 괜히 심통도 나고 왜이리 못하나 스스로 짜증도 나고,
분명 재밌자고 시작한 것인데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스스로를 화나게 할 줄 몰랐다.
4번의 경기를 나갔고, 4번의 경기 모두 져버리면서 우리는 예선 탈락을 했고
그렇게 5월의 배구 경기는 마무리 되었다.
지지리도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운동을 좋아하는 건 어느 정도 보였는지
같이 배구를 했던 선생님께서, 혹시 교사 배구 동아리에 같이 해보겠냐고 물어봐 주셨다.
심통이 제대로 난 부진아였던 나는 죄송하다며 거절했다.
신체 기량 차이가 나는 남녀가 같은 팀을 이루어 경기해야하는 학교 배구 경기는 영 맞지 않다며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합리화를 이루었고 그것으로 배구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배구를 배우러 가면 부진아 수준의 내 배구 실력을 다시 한 번 드러내야 하니 그것이 싫었다.
하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같은 학교 선생님께서는 배구 동아리 선생님들이 너무 좋으시니
여러 선생님들과 인맥 쌓는다는 생각으로 나와보는 것이 어떻겠냐 한번 더 물어봐 주셨다.
그때 쯤, 타교대 출신이라 교직에 친구들이 많이 없어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부끄러운 배구 실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나 해보자 싶어 배구 동아리를 방문했다.
뭐 예상했던 바지만 그날은 정말이지 몸개그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못했고 그래서 너무 부끄러웠는데
배구 동아리 선생님들께서는, 정말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신체가 운동하기에 정말 좋다,
조금만 연습하면 되겠다,
공 맞추는 것도 어려운데 기본 감각이 좋다 등등.
그리고 서브를 넣을 때는 코트의 중간 지점에서 넣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주셨다.
또 하나 더, 그날 배구 연습에서 참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파이팅! 문화였다.
뻘쭘하게 경기장에 서 있던 나에게 같은 동아리 선생님께서 농담처럼 하신 말이 있다.
축구는 공간싸움! 야구는 흐름! 농구는 영역싸움! 그리고 배구는 뭐다? 파이팅이다.
정말로 배구는 점수를 얻었던, 잃었던, 서브를 성공했건, 실패했건,
하나의 텀이 끝나고 나면 항상 모여서 파이팅을 나눈다.
잘하면 잘했다고 신나서, 실패하면 괜찮다고 격려하며, 전체가 모이기도 하고
경기가 빠르게 진행되어야 할 땐 주변 사람들과 손 맞추며 파이팅을 한다.
작년 6월 이후로, 지금까지 별일 없으면 일주일에 꼭 한 번씩 배구 동아리 운동에 참석한다.
여전히 배구를 매우매우 못하지만, 대신 못해도 정말 즐겁다.
못해도 파이팅 하면서 격려받고, 아주 가끔 우연으로 리시브를 받고 나면 또 칭찬의 파이팅도 받고.
나도 다른 팀원이 잘하면 신나서 달려가서 파이팅하고 오고, 아쉽게 실수해도 잘했으니 파이팅 해드리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쌓이면서 이제는 라인 밖에서도 서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부진아가 되어보고, 그래서 해당 과목을 싫어도 해보고, 격려도 받고 해보니. 파이팅 문화가 참 좋았다.
그래서 우리 교실에서도 배구의 파이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쯤, 특히 피구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여러 의견이 나왔었다.
사실 피구를 하다보면 잘하는 몇명에게 기회가 많이 갈 수 밖에 없고,
잘 못하는 친구들에게는 피구라는 경기 자체가 재미없고 싫어하는 경기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피구 경기를 좋아하는데, 특히나 피구를 매우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들은
피구를 싫어할 수 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잘하든 못하든, 모든 학생들의 공통점은 피구를 잘하고 싶고, 또 좋아한다는 것.
배구동아리에 나간지 한달도 안되었지만, 마치 오래 운동을 해온 것 마냥
학생들에게 승패와 실력을 떠나 다같이 격려하며 운동하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 직접 겪었던 것,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겪었을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이후로 피구와 관련하여 학생들 스스로 룰을 정했다.
1. 피구 공격의 경우, 한 사람이 연속해서 하지 않을 것. 전체가 공격을 한 번씩 하고 난 뒤 다시 공격에 참여하기.
2. 만약 공격에 실패하거나, 경기에서 지더라도 반드시 매 턴마다 '잘했다.'라고 격려할 것.
그 때 이후로 우리반의 체육수업 모습.
언제나 파이팅으로 시작한다.
경기에서 서로의 실력차나, 실수로 비난하는 모습이 사라지니 체육수업에는 자연스레 협동이 된다.
그리고 2학기, 전교학생임원의 공약으로 진행된 교내 피구대회.
이 때에도 역시나 파이팅부터 시작이다.
예선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날.
결과를 바라고 한 파이팅은 아니지만, 신기하게 결과도 좋았다.
반별 피구대회에서 우승까지 하게 되었다.
여전히 못하는 친구는 못하고, 잘하는 친구는 잘하지만
그래도 못하는 친구의 경우 실력이 조금씩 늘었고 이전에 많이 못함->조금 못함으로 성장했다.
(나도 배구는 심각하게 못함에서-> 이제는 그냥 못함, 으로 발전했다.)
부진이었던 내가 겪었던, 그리고 배구 동아리를 통해 바뀌어 간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요약해보면
1. 못하면 열심히 해봐야지, 가 아니라 나는 그것이 싫다, 라는 감정으로 생각될 수 있다.
피구가 아니라, 수학이든 미술이든 국어든 내가 못하는 영역에서 싫다는 마음이 함께 시작된다.
이것을 못하니, 그것을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을 스스로 갖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2. 과정에서의 진심 어린 격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고전에 해당할 정도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경험할 일은 잘 없다. 과정에서의 진심 어린 격려대신 채찍질을 경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잘할 수 있게 격려 하겠다'는 '앞으로 잘해야 한다'는 의미 또한 내포 되어 있다.
정말로 과정 그 자체에서 격려가 필요하다.
잘하면 잘했다고 파이팅, 실패했으면 또 그렇다고 파이팅하는 배구처럼
정말로 과정 그 자체에 대한 파이팅에서, 힘을 얻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나는 여전히 배구 부진이지만 그래도 배구가 재밌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배구 실력이 예전에 비해 아주 향상된 것도 스스로 느낀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배구를 즐겁게 잘 하고 싶다.
부진경험이 다른 이의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나'는 2월부터, 다시 열심히 이어 쓰도록 하겠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