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록 손글씨 -2-
#저의_취미와_특기는_손글씨_입니다.
에프터스쿨 방과후 반에서 쌓아간 아마추어 서예 실력과 볼펜 덕심이 합쳐지면서 손글씨는 나의 취미이자 특기가 되었다. 그리고 점차 친구들로부터 손글씨가 예쁘다는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새학기 시기에는 매번 사인회가 열린 것 마냥 친구들의 이름을 써주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과목별로 교과서 외에 보충교재로 문제집을 사용했다. 학기 초에 반 친구들이 사온 문제집 몇 십권을 책상 위에 한 가득 쌓아 놓고 예쁜 글씨로 써주는 작업을 했다. 학기 말에는 과목별 노트 필기를 복사해서 다같이 돌려 보았다. 친구가 보고 있는 노트 복사본의 글씨체가 익숙하다 싶어 살펴보니, 내 글씨체인 경우가 가끔 있었다.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거나, 운동을 뛰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씨는 예쁘게 잘 쓸 수 있다는 자랑 거리가 생겼다.
#새로운_노트와_펜
#칠판과_분필
교단에 들어오고 나니 새로운 필기 장소가 생겼다. 종이에 사각사각 적던 것에서 이제는 공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손글씨인 판서였다. 주로 이용하던 펜인 0.5mm, 0.3mm와 다른 20mm의 분필로 종이 대신 칠판에 쓰는 과정이었다. 손글씨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니, 당연히 판서도 잘 쓰고 싶었고 열심히 연습했다. 나중에는 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학습 내용을 컴퓨터 화면으로 안내하는 것 보다 손글씨로 판서하는 것을 더 좋아해 주었다. 노트필기를 통해 연습했던 손글씨는 이제 본격적인 판서로 바뀌게 되었다.
판서를 할 때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의 손글씨를 사용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는 성을 따서 일명 차차체로 불렀고, 조금 더 각 잡고 쓴 진중한 느낌의 글씨체는 차쌤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글동글 차차체는 예전 교보문고에서 진행한 손글씨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상금도 받고 광화문에서 전시가 되었다. 학생들과 지인들이 종종 컴퓨터에서 사용 가능한 차차체 폰트는 언제 나오냐며 묻기도 했는데. 정말로 감사하게도 정말 폰트로 만들어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번엔 각 잡고 쓴 차쌤체가 국민 보물찾기 공모전에서 수상하게 되어 서체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차쌤체는 아마도, ‘차쌤체’로 이름이 정해져서 3월 9일 이후 공유마당에서 저작권 없이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이 가능하니 애용해 주신다면 정말 영광입니다! -급 홍보)
#이것은_숫자 6인가_0인가
#운동장에서_뛰어노는_글씨들
자기가 쓴 글씨를 자기가 못 알아보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설마, 자기가 쓴 건데 어떻게 자기가 못 알아볼까 싶었는데, 정말로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6학년 교실에서 수학 수행평가를 살펴보면 이것이 숫자 6인지 0인지, 6인지 8인지, 혹은 숫자인지 고민의 흔적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쉬는 시간에 해당 숫자를 쓴 친구를 살짝 불러 무슨 글자를 쓴 것인지 물어보았다. 분명 본인이 쓴 글씨인데 본인이 뭐라고 썼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에, ‘경필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손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독성을 높이고 자신의 개성이 담긴 손글씨를 갖기 위함이다.
손글씨 수업에 참가한 친구들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노트 필기에 어느 정도 욕심이 있으며 반듯하고 예쁜 손글씨를 갖고 싶어 하는 자발적 참가파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수행평가 과제를 확인하면서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기에 반강제로 수업에 참가시킨 유형, 일명 발가락 글씨파. 자발적 참가파는 예전의 나를 보는 것처럼, 취미생활의 일부로 손글씨 수업에 참가했다. 하지만 반강제 참가파는, 처음에는 분명 손글씨를 쓰는데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아 보였다. 운동장 대신 종이 위에서 글씨들이 뛰어다니는 듯한 자유분방함이 있었지만 학기 말에는 눈에 뛰게 가독성이 높아졌던 덕에, 매년 한 해를 정리하며 학급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시간에 ‘경필쓰기’ 활동은 ‘괴롭지만 ㅎㅎㅎ(이 웃음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나면 분명 뿌듯하고 도움이 되는’ 활동으로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도 희망자와 반 희망자를 적절히 섞어가며 진행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가는 이 시기에, 손글씨 수업을 하는 것이 역행이 아닌가 싶다. 마치 당장이라도 스마트 패드와 타이핑이 교실의 노트와 펜과 연필을 모두 다 대체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손글씨를 써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생각의 정리가 일어나고, 손글씨로 적은 글을 전하는 과정에서 진심이 꾹꾹 눌러 담길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반 친구들은 자신의 이름을 적는 자필 서명도, 멋진 손글씨로 했으면 좋겠다. 예쁜 손글씨 보다, 담긴 손글씨를 써내려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